[독자기고] 생각하는 사람은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한의진/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생

2022-06-14     성광일보

- 우리와 공존하는 괴물에 대하여 -

세상은 다면적이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각 개체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좋은 면이 있는가 하면 나쁜 면이 있고,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다. 사람들은 여러 입장에서 서로 공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공존한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용서의 미 덕에 대해 배웠다.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을 곪게 할 뿐 아니라, 진 정으로 용서를 베푸는 이가 승자라고.

형법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응보, 일반예방, 그리고 특별예방이다. 응보와 일반예방은 범 죄라는 악행에 대한 사회적 보복과 이를 ‘일반인’에게 노출하여 영향을 줌으로써 범죄를 예방 하려는 목적이다. 특별예방은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로 하여금 또다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 는 것인데, 단순히 징벌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범죄인의 개화와 사회 적응에 도움을 줌 으로써 재범을 예방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과 개화가 피해자의 곁에서 일어난다면 어떨까?

영화 <컬러 퍼플>은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 ‘셀리’는 흑인 여성으로, 철저히 하위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의붓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팔려 간 것으로도 모자라, 사랑하는 동생과 이별하고 ‘미스터’로 부르는 자신의 남편과 그 아 이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셀리의 일상이다. 그러나 셀리는 다른 여성들을 만나며 변화하고 스 스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셀리는 마침내 미스터로부터 해방되고, 그가 자신의 길을 방해하려 하자 단호하게 막아서며 자신의 의지를 내보인다.

<컬러 퍼플>은 개봉 이후, 대중으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았는데, 억압된 흑인 여성의 성장사 를 잘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드라마틱한 불행을 ‘셀리’라는 한 인물에게 몰아넣어 흑인 남성을 일반화하고 괴물화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중 글에서 집중하고 싶은 평가는 <컬러 퍼플>의 원작자, 소설가 앨리스 워커의 비판이다. 앨리스 워커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다 같이 공존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가장 악 인인 미스터조차 이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족에 미스터는 배제되어 있다. 앨리스 워커는 이 장면을 두고 “가족은 다시 연결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가능함 을 믿어야 한다.”라며 영화의 결말이 원작의 결합과 용서를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폭력의 주체가 늙고, 힘을 잃었고, 반성했다고 해서 피해자가 그를 용 서하고 집단에 받아주어야 하는가?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떠나 부모와 자식 관계에도 쉽게 대입할 수 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성폭력을 저지른 부모가 늙고 병이 들어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누구나 교화와 성장의 기회를 가지지 만, 가해자가 피해자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가도 되는가? 가족 내 범죄는 특성상 잘 고발되지 않고 고발된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가족 내로 돌아오는 경우가 다분하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거부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족’의 이름은 무겁다.

미스터가 정말 반성했는지는 미스터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해서, 그의 피해자들이 그를 용서하고 포용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용서라는 미덕의 아래, 우리는 가해자의 반성을 진실한 것으로 확신할 수 없고 법정에 회부된 가해자가 반성을 흉내 내는 것 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해자는 책임지지 않는다. 피해자의 기억과 상처는 용서로 고칠 수 있 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큰 보상도 용서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폭력에 익숙해져 살던 이들이 비로소 폭력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가해자 가 돌아오면, 이들은 비로소 괴물이라고 알게 된 자와 함께 잠을 자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