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는 순조의 승하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면서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김조순의 딸)가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된다.
1840년 6월, 동지부사로 임명된 직후 병조참판을 지내던 추사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10년 전 마무리되었던 윤상도 옥사가 김우면 등 안동김씨에 의해 재론되면서 그 배후에 김노경과 김정희가 있었다는 모함이 뒤따랐다.
김우명은 추사가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에 비인 현감에서 봉고파직 당했던 인물이다. 윤상도 옥사란 10년 전인 1830년 종6품 부사과 윤상도는 호조판서 박종훈, 전 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순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윤상도가 추자도로 유배 간 사건이다.
지금 재거론하는 것은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던 김정희와 그의 벗인 당시 우의정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에 대한 안동김씨의 견제가 빚어낸 명백한 정치공작이었다. 이 사건은 윤상도 배후에 김노경, 김정희가 아니라 오히려 안동 김씨가 얽혀있다는 것이 밝혀질 즈음 서둘러 매듭을 짓고 당사자인 윤상도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탄핵 대상인 추사는 6차례 형문으로 36대의 신장(訊杖)을 맞아 초주검이 되었다. 다행히 우의정이었던 친구 조인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1840년 9월 제주도로 유배를 가 게 된다. 경주 김씨 가문을 대표하는 추사를 제거하려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강력한 의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 1848년(헌종 14년) 12월 제주 유배에서 9년 만에 풀려난다.
추사에게 닥친 두 번째 위기는 헌종의 승하이다. 1849년 6월 헌종 승하 후 왕실의 직계 후사가 끊어져 헌종의 9촌 숙부인 철종이 왕위 계승자로 영입되었다. 이때 호칭과 계보, 제사 등 여러 가지 전례상의 문제들이 생겨 진종(영조의 맏아들, 추존왕)의 신주를 종묘 본전 안의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는 일(조천)로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이 논쟁은 안동 김씨가 주도한 가통과 왕통이 일치하지 않는 철종 임금의 승계 방식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권돈인 등 간접적인 비판 세력을 숙청하는 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추사는 중요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음에도 권돈인과 친분 때문에 1851년 8월 초 북청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다. 1852년 8월 유배에서 풀려난다. 경주 김씨를 비호해 주던 왕들이 세상을 떠나자 정적들은 비수를 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반칙도 불사하며 달려드니 칼날을 피할 수가 없다. 그가 당한 두 번의 큰 위기는 결국 유배로 귀결되었다.
세도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만큼 정적들의 견제도 그것에 못지않다. 이러한 것들을 견뎌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며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었을까.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던가. 추사에게도 적용되는 비유인 것 같다.
두 번째 단계는 사막에서 사자가 되어 용과 싸워야 한다. 추사는 어떤 무기로 용과 싸웠을까? 바로 추사체다. 추사체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렇다. 기괴하고 신비한 기운이 넘치는 서한 풍이다.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필사체筆寫體를 충분히 읽혀 부조화스러운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에 아름다움이 있다. 공간개념이 있다. 상식파괴, 불규칙적 움직임, 형태 파격, 전체를 봐야 보이는 글씨다. 자유로운 구사와 그림 같은 글씨다. 단순함을 뛰어넘어 조형미로 승화시킨다. 무한한 자유를 주되 전체를 벗어나지 않는 강약의 힘이 있다. 어떤 이는 추사체에서 큐비즘을 해석했고 또 어떤 이는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언어를 150년 전에 구사하고 실천했다고도 한다.
추사체는 새로운 서체를 구현하려는 추사의 실험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동국진체가 최고 글씨체이며 다른 사람들은 이 글씨체를 흉내 내려고만 할 때 추사는 금석학 연구를 통해 독창적인 추사체를 만들었다. 추사가 금석학을 연구하기 이전에도 비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비석에 적혀있는 내용 보다는 오로지 글씨 자체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탁본만 뜨고 비석을 그냥 방치된 상태로 두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추사는 25세에 동지겸 사은부사 김노경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다.
거기서 청나라 고증학의 집대성자 완원과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 옹방강을 만났고 그들의 고증학과 금석학 및 서체 등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번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고 사제의 연을 맺으며 계속된 교류는 중국의 서체와 학문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금석학 연구를 통해 왕희지 이전의 전한(서한) 시대 비문을 접하고 왕희지를 중심으로 연구하던 철학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영향으로 1816년(순조 16년) 30세 나이에 무학無學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해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