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살곶이다리
[수필] 살곶이다리
  • 성광일보
  • 승인 2022.10.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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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식/
성동문인협회 이사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최운식

KBS TV의 역사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이 불화하는 것을 보다가 문득 ?살곶이다리 전설?이 떠올랐다. 이 다리에는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에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에 대한 이성계(태조)의 미움과 분노, 용서와 화해와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서울시 성동구 성동교 동쪽 중랑천에 있는 이 다리를 다시 찾았다.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 출구로 나가 50미터쯤 직진한 뒤 왼쪽으로 조금 가니 이 다리가 보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향처(鄕妻)인 한씨에게서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여섯 아들을 두고, 경처(京妻)인 강씨에게서 방번?방석 두 아들을 두었다. 왕위에 오른 태조는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를 제쳐 두고, 강씨 소생의 여덟째 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래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왕자 방원은 세자 책봉뿐만 아니라, 방석의 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과 남은?심효생 등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태조 7년(1398) 태조의 병이 위중하여지자 왕자들이 모두 궁중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방원은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트집을 잡아 먼저 이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은 변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이고, 세자의 동복형인 방번도 죽였다. 방원은 둘째 형인 방과가 세자가 되도록 하였다. 사랑하던 강씨 소생의 왕자와 총신을 잃은 태조는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래서 왕위를 세자(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 2년(1400) 태조의 넷째 왕자 방간이 왕위에 뜻을 두고, 바로 밑의 동생인 방원을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간 방간이 군사를 동원하여 방원을 치려 하니, 방원도 군사를 일으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방간은 패하여 귀양을 갔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난이 끝난 뒤에 정종은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성석린을 보내어 태조를 한양으로 모셔 왔다. 

그런데 태조는 태종 2년(1402)에 다시 함흥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태종은 태조가 노여움을 풀고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하려고 여러 번 차사를 보냈다. 태조는 태종의 편이 되어 자기를 설득하러 오는 차사를 모두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일로 한 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였다. 태종이 함흥에 차사로 갈 사람을 찾을 때 판중추부사 박순(朴淳)이 자청하였다. 그는 새끼 딸린 말을 타고 태조 숙소 가까이 가서는,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을 타고 갔다. 그러자 새끼 말이 어미를 부르고, 어미 말은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말의 행동을 괴이히 여긴 태조가 그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는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런다고 하였다. 태조는 그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지만,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였다.

태조가 박순과 장기를 두고 있을 때 쥐가 지붕 밑에서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쥐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를 본 박순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박순이 떠나니, 옆의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이미 건넜으리라고 생각하고, 그가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박순이 중도에 병이 나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에 도착하여 배에 올랐을 때 사자가 와서 그의 허리를 베었다.

박순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태조는 그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참조). 태종은 뚝섬에 큰 차일을 치고 태조를 맞이하기로 하였다. 태종은 하륜의 말을 듣고 차일의 기둥을 큰 것으로 세웠다. 가까이에 온 태조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서성이는 태종을 보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얼른 활시위를 당겼다. 태종이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피하니, 화살이 기둥에 꽂혔다. 태조는 천하 명궁인 자기의 화살을 피한 것은 천명(天命)이라면서 노기를 풀었다(??이규태의 600년 서울?? 참조). 환영 잔치를 할 때 태종은 하륜의 말에 따라 잔을 중궁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다. 이를 본 태조는 소매 속에서 작은 철퇴를 내어 보이며, 태종이 가까이 오면 내리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 참조).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뚝섬을 '화살이 꽂힌 벌'이란 뜻으로 '살꽂이벌' 또는 '전교(箭郊)'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뚝섬으로 가는 중랑천에 다리를 놓기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했다. 이 다리 이름을 이곳의 지명을 따서 '살꽂이다리',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라는 뜻에서 '제반교(濟盤橋)'라고 하였다. 그런데 '살꽂이다리'는 음이 변하여 '살곶이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에 콘크리트 덧칠을 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홍수에 다리 일부가 떠내려갔다. 이렇게 수난을 겪던 이 다리는 1972년에 서울시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하천의 폭이 넓어져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하여 세웠다.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폭 6m, 길이는 76m로,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시대 석교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 이야기에서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의 공로를 무시하고, 여덟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 결정은 경처 강씨를 총애하고, 막내아들 방석을 편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로 골육상쟁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 제공자는 태조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방원의 무도한 행동만을 문제 삼아 분노를 품었다. 그는 방원이 분노의 결정체인 화살과 철퇴를 피하는 것을 보면서, 천명이 방원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이 분노를 내려놓고 방원을 용서하게 하였다. 그래서 태종의 왕위를 인정하고, 태상왕으로 태종의 효도를 받는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태조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변화시킨 뜻있는 곳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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