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있는 풍경] 시인의 길로 들어서며
[에세이가 있는 풍경] 시인의 길로 들어서며
  • 성광일보
  • 승인 2024.06.1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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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남정
(수필가, 문학세계 정회원)
내남정 수필가

나와 시의 첫 인연은 60년대 초 보성중학교 재학 시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인이셨던 조종현 국어 선생님의 독특한 매력과 기행에 이끌려 교내 문예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분의 시상에 심취하여 첫 학급문예지 『고갯길』에 자작시를 실었던 추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당시 승려 신분이기도 하였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자주 승복을 입고 유명시를 읊으며 입실하는 특이한 행동을 보여 학생들에게 인기도 높고 박수갈채도 자주 받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세월이 한참 흐르고 대학 졸업 후였다. 군대 생활에서 만난 아가달님과 연애하며 남몰래 백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그 속에 순수한 언어로 채워진 뜨거운 사연과 꿈 같은 밀어로 써내려간 서투른 작품들. 그 손 편지가 지금껏 내 젊은 시절 옛 추억의 바다 밑에 깊이 숨어 고이 잠들고 있었다.

어느덧 고희를 넘기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자서전으로 쓸까? 아니면 회상록으로 정리할까?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면서 잊고 지냈는데 세월은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재작년 초, 심장병으로 3주간 입원했을 때 불현듯 이번에 잘못되면 병원 문을 못 나설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언뜻언뜻 그 생각으로 가슴이 먹먹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내 삶의 마지막에 남길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반백 년 전 그 추억의 보물들을 다시 꺼내 읽어 보곤 했다. 한없이 벅찬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마침내 그 애틋한 젊음의 사연을 책으로 남기리라 결심했다. 

그간 부모님의 완곡한 반대를 무릅쓰고 간곡히 설득시켜 아가달님과의 사랑은 결실을 맺고 말았다. 두 사람의 사랑에 하늘도 감동했나 보다. 마침내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알뜰살뜰 꾸려졌다. 삼형제와 다섯 손주를 두고 이 나이까지 행복하게 살아온 나의 인생사였다. 이 세상에 가정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으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미션이라 절감했다. 3년여에 걸친 그녀와의 Love Story를 정리하며 남기고 가야 하겠다. 148통의 주옥같은 서신들! 하얀 창호지와 핑크빛 종이 위에 정성들여 써 내려간 그녀의 진심을 한 줄씩 읽어가며 나도 모르게 많이 울고, 놀라고, 반성하고 질책했다. 그 정성에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지 않았던가.

홍천 남산골 푸른 풀밭을 거닐며 뒹굴기도 했다. 꽃반지 만들어 끼워주고 뜨거운 포옹 속에 주고받던 밀어와 약속들 오죽이나 많았던가. 서울과 홍천으로 서로 떨어져 애타게 보고픈 심정을 절박한 언어로 호소하던 못다 한 사연들도 쌓이고 쌓였었지.

춘설 분분한 화양강가를 거닐며 새봄의 환희와 바람을 염원하던 각시와 선머슴의 절규들. 말 못할 사연을 눈물로 고백하며 공작산 산사의 「원통보전」 관세음보살께 선처를 기원했던 108배는 힘든 줄도 몰랐었다. 새 생명을 가슴에 안고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말 못하는 고민 속에 얼마나 떨었던가. 오직 '푸른 별님'만 의지했던 애처로운 '아가달님'의 절절한 몸부림의 결실이여!

드디어 「사모」, 「그리움」, 「춘심」, 「우리 님」, 「길상사」 등의 작품으로 거듭 태어나고 말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그 추억을 마주하며 피 끓던 사랑과 고뇌 그리고 기다림의 염원이 내게 시상으로 되살아났다.

「별들이 속삭이고 달님이 산책하는 적막의 공간을/ 천사의 모습으로 넘나드는 당신// 희고 고운 손으로 나의 목마름을 향해 손짓하는 그대의 호소/ 불현듯 생각나서 허공으로 흘려보내는 그 엷은 눈길은/ 아! 천년 자비를 머금은 찬란한 여래님의 미소// 노여움을 간직한 듯 토라진 눈가에 깊은 시름의 빛/ 이슬처럼 맺힌 눈물의 깊은 심연 속엔/ 진실의 소망이 더욱 짙어라// 숨결보다 더 부드러운 님의 입술 위에/ 평안의 나래를 펼친다// 영롱한 눈망울에 비친 당신의 세계/ 슬픔 따위에 눈멀까마는/ 천년이 흘러도 그대의 진실은 사랑이어라」
― 사모(思慕)―필자의 자작시, 전문

입원 내내 나는 그 편지 속의 사연들과 한없이 대화하며 지냈다. 그때마다 나는 죽도록 쓰고 싶은 충동과 눈물겹도록 참을 수 없는 감상에 젖어들곤 했다.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용기를 내어 시작(詩作)의 펜을 들고야 말았지. 더구나 늦은 나이에 투병 중인 어려움 속에서도, 시는 내게 삶의 희망을 주고 현실을 미화하며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마법의 역할을 했다.

앞으로 나는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시로 읊으며 꾸며보련다. 오늘도 절실한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존재와 가치를 찾고 헤매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실존의 이유이며 시인의 길로 들어선 각오가 아니던가.
아울러 늦게나마 나를 시인의 길로 인도한 나의 아가달님이여! 李紀分畵伯의 진심과 배려에 참으로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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