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40여년 수제 축구화 제작, 수선업체
외길 40여년 수제 축구화 제작, 수선업체
  • 박종승 기자
  • 승인 2016.01.1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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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 축구화 장인 신창스포츠 김봉학 사장

“수십 년 동안 축구화를 팔면서 하자가 발생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동종 동료들 수익성 떨어지자 모두 떠나 수제 축구화업계 유일한 장인으로 남아”

▲ 국내 유일의 맞춤식 수제 축구화 장인 김봉학사장
국내 유일의 수제 축구화 신창스포츠 김봉학사장의 2016년 꿈은 한결같다. 40여년 외길 수제 축구화 장인인 그의 꿈은 절실하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소원이 있다.
“돌도 되지 않은 아들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22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 그 아들이 긴병을 이겨내고 일어나기를 바란다.”
두 번째 소원은 “북한 평양에 축구화 공장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김봉학사장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 옛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조그만한 공장을 개업했다. 수제 축구화를 만드는 일보다는 수선에 치중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와 88 서울 올림픽대회를 통해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글러벌 브랜드가 수입되고 프로스펙스 등 국내 스포츠 브랜드가 대량으로 생산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브랜드 축구화가 비싸다보니 축구화를 고쳐서 신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수선 업에 치중했다. 수선을 하면서도 그의 오랜 꿈인 수제 축구화 제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김 사장은 1997년 마침내 수제 축구화 완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신창스포츠'란 반듯한 간판을 걸고 본격적으로 맞춤 축구화 제작업에 뛰어들었다. 축구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던 찾아가 축구화를 팔았다. 수제 축구화를 만드는 자체가, 유명브랜드 공세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지만 김 사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40여년의 외길 수제 축구화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축구 동호인들이 아디다스 등 대형업체의 브랜드에 익숙해져있어 수제 축구화를 팔기 쉽지 않았지만 신창스포츠 제품을 한번이라도 신어본 사람들은 다시 찾았다”며 꿋꿋한 장인정신(匠人精神)으로 버텼다. “유명 브랜드에서 만든 축구화의 색상이나 디자인 부분은 신창제품보다 분명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편안하고 튼튼한 부문에서는 자사제품이 대형브랜드에 절대 뒤지지 않다”며 기술우위를 자신한다.

김봉학 사장은 “최상의 소재를 사용하고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기 때문에 오래 신어도 축구화가 뒤틀리지 않고 변하지 않은 점이 신창 수제 축구화의 최대 장점이다”라면서 “사람의 발은 오른발과 왼발의 크기와 발등의 두께, 모양 등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체크하여 축구화를 제작하다보니 축구실력이 더 향상될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니냐?”며 발의 사이즈를 치밀하게 재며 도안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보관하기를 권유한다.

축구화에서만큼은 어떤 유명브랜드와 품질을 견주어도 우수함을 자부하는 발로(發露)이다.
김봉학(55)사장의 수제 축구화 외길은 파란만장(波瀾萬丈)하다. 그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74년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축구화를 만들면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에 13살의 어린나이에 축구화제작 공장에 취업했다.

신발 만드는 일에 접한 그는, 신발 부속품에 본드를 바르고 철심을 박는 일로 수제 축구화제작업종에 입문했다. 그 시절 그랬듯이, 나이가 어리고 기술이 없어 실수라도 저지르면 사장으로부터 여지없이 망치가 날아와 머리를 강타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정해진 월급을 받는 대신 초라한 공장 한 귀퉁이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적은금액의 용돈을 받으며 고달프게 일했다. 그는 그 시대의 아련한 아픔을 회상하며 살포시 웃는다.

당시에는 신발 만든 개수 만큼 임금을 쳐주던 시대여서 아무도 그에게 기술을 섣불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기술을 쉽게 배울 수 없어, 그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히며 수제 축구화 명장반열에 올랐다.

유명브랜드로 인해 수제 축구화의 몰락을 급속도록 빨랐다. 같은 업종에 종사한 동료들은 수익성이 떨어지자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더니 결국은 혼자남아 수제 축구화업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장인으로 남았다.

 
김 사장은 22년째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처절하리만큼 수제 축구화 사업에 매달렸다. 손재주가 남다른 그는, 눈을 뜨면 조기축구회 등 축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축구화를 팔러 다녔고 아내는 수선할 축구화를 고객으로부터 받아놓았다. 그는 밤늦게 공장에 돌아와 날 새는 줄 모르고 일하는 시간이 다반사(茶飯事)였다.

성동축구연합회 금일축구회(회장 전덕주, 금북초등학교)에서 복대로 복막투석기를 감고 축구하는 김봉학 사장. 하루에 4번 2000cc의 약을 투여하는 중증환자다. 그에게는 축구가 생활수단이면서도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업여력이 넉넉지 않으면서도 축구화 기부를 빠트리지 않는다.

성동구 장애인축구팀에 축구화를 기증하고 북한 17세 이하 여자월드컵축구팀에 40켤레를 기증 해 우승하는데도 기여했다. 북한은 우승 감사의 뜻으로 김 사장을 북한에 초청했다. 그가 북한 평양을 방문해 축구화 기술을 전수해주는 도중 2010년 5.24조치가 발생했다.

천안함 폭침에 따른 남북관계 단절 여파로 기술전수를 마무리 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아쉬움도 컸다.
2011년 초에는 인천유나이티드 당시 송영길 인천시장과 안종복 단장으로부터 북한을 도와주자는 제의가 들어와, 중국 단둥에 공장을 마련해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서울 신창스포츠 공장기계 등을 모두 옮겨 북한 노동자들이 수제 축구화를 제작하고 국내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 와중에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 체제로 바뀌면서 수제 축구화프로젝트는 또다시 중단됐다. 두 차례의 좌절여파로 김 사장은 병을 얻어 복막투석기를 매단 채 수제 축구화사업과 투병을 병행하고 있다.

김봉학 사장은 “수십 년 동안 축구화를 팔면서 하자가 발생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품질에 대해서는 어떤 축구화보다 자신 있지만 고객들은 메이커를 찾는다. 수제 축구화를 신지 않으려는 선입견이 있어 무척 속상하기도 하다“면서 “그래도 '내 발에 꼭 맞다'. '신어 보니 무척 편하다'”라는 고객들의 말에 수제 축구화 사업을 아직 접지 못한다. 주위에서 수백 번 그만 수제 축구화사업을 접으라고 권유하지만, 그의 실력을 입소문 듣고 찾아온 고객들을 위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외길을 걸으려한다. 지방에서도 전화가 걸려온다. “내일 방문 하겠다”며 교통편을 물어본다. 본 기자의 발도 양발이 편차 나, 40년 생활축구인생 최초로 '신창 수제 맞춤축구화'를 신고 골을 더 넣어보겠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연락처: 010-6254-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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