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물광장>세 왕의 전설 - 낙천정(樂天亭) 이궁(離宮)에서의 화락(和樂)
<다물광장>세 왕의 전설 - 낙천정(樂天亭) 이궁(離宮)에서의 화락(和樂)
  • 성광일보
  • 승인 2016.11.1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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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 교수/건국대 사학과

▲ 한정수 교수/건국대 사학과
광진구에는 조선의 정종과 태종, 그리고 세종의 만남이 서린 유적이 있다. 바로 낙천정(樂天亭)이다. 주소로 보면 광진구 자양로 3가길 43에 있다. 현재의 정자 건물은 1991년에 복원되어 기증된 것으로 1993년 서울시 기념물 12호로 지정하였지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져 결국 2009년에 해제되었다. 현 낙천정은 본래 위치와도 200m 떨어져 지어졌다. 지금은 그 높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낙천정의 원래 위치는 42.8m 높이의 대산(臺山)에 있었다. 이 산은 예전에는 시루 혹은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하다하여 시리미산(甑山)이나 발산(鉢山)이라 하였었다.

이곳 낙천정에는 세종 초 대산 언덕의 간방(艮方 ; 정동과 정북의 한 가운데, 45도 방향)에 이궁 100여 칸 정도를 함께 지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머물곤 하였다. 오늘날에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옛날에는 낙천정에 올라 있으면 한강의 유유함과 아차산, 용마산, 도봉산, 인왕산, 삼각산,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 등이 뭇별들이 북두성을 둘러싼 듯한 풍광을 자아냈다 한다. 지은 목적으로 본다면 상왕으로 물러난 뒤 유람하며 노후를 즐기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던 듯하다. 그러나 낙천정과 이궁은 다른 기능도 많았다.

낙천정의 주인공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1418년 8월 충녕군으로서 세자가 된 세종에게 양위하고 동교(東郊)로 유람하다 하늘이 만든 훌륭한 곳〔天作之勝地〕을 찾았으며, 이에 이궁(離宮)과 낙천정을 지었다. 변계량이 지은 기문에 의하면 당시에 상왕 태종의 명으로 궁궐 밖 행차 시 머무르는 이궁(離宮)과 함께 언덕 위에 정자를 지었다 한다. 그리고 좌의정 박은(朴?)에게 이름을 짓게 하였는데, 『주역』 계사(繫辭) 편에 나오는 “천명을 알아 즐기니 우환이 없다〔樂天知命故不憂〕"라는 대목에서 '낙천(樂天)'이라는 글자를 따 낙천정이라 하였다.

태종은 변계량에게 이 누정을 짓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의미 등을 정리한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고, 변계량은 '낙천'이라는 글자를 놓고 그 의미부여를 하였다. 즉, '낙천'이라는 글자에는 태종이 행한 일을 총괄하여 정자 이름에 그 뜻을 붙인 것이고 또 그 즐거움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변계량은 이어서 태종이 고려 말부터 천명을 좇아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태조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위해 정종을 세워 종사를 평안하게 하였다 하는 한편 즉위하여서는 태조를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형인 정종을 우애로 가까이 하면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시켰음을 지적하였다. 더구나 재위 중에는 세종에게 선위를 하고 상왕이 되었다. 이 부분이 천명이 돌아가는 바를 알고 자연스레 이를 즐겼다는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본뜻으로 여겼던 것이다.

사실 태종은 한양 도성 사방으로 이궁 4곳을 지었다. 세종 초에 완성되었는데, 남으로 낙천정 이궁, 북으로는 장위동 본궁, 동으로는 풍양궁, 서로는 연희궁을 건립하였다. 이는 도성을 호위하는 역할임과 동시에 궁궐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옮겨 있을 수 있는 곳으로 활용되었으며, 농한기 등에 휴식처이자 유람처로 이용되었다. 이를 일러 피방이궁(避方離宮)이라 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낙천정 이궁이었던 것이다.

낙천정 이궁이 더욱 와 닿는 것은 이곳에 정종-태종-세종 세 임금이 나아와 풍광을 즐기고 우애와 효를 나누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변계량의 광경 묘사를 보자.

 “우리 전하께서 상왕을 모시고 주연을 나누면서 말 없는 중에 서로 부탁하고, 주상 전하께서는 그 사이에 주선하시는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어버이는 자상하고 아들은 효도하여 기뻐하시니, 천하의 낙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여기서 우리 전하는 태종을, 상왕은 정종을, 주상 전하는 세종을 말한다. 신하로서 볼 때 세 왕이 모여 우애와 효를 나누는 모습 속에서 천하의 즐거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태종은 낙천궁 이궁에 자주 행차하여 머물면서 농사를 살피기도 하고 해청(海靑)을 날려 매사냥을 하였으며, 형인 정종과 연회를 즐기기도 하였다. 세종은 그러한 태종을 뵙기 위해 술과 안주 등을 가져와 주연을 열었다. 특히 세종 2년 5월 16일(계미) 태종의 탄일(誕日, 생일)이 되자 세종이 태종의 장수를 비는 헌수를 행하는 하례가 있었다. 이때 양녕대군·효령대군 등과 유정현·변계량·박자청·한확 등이 입시하였다.

또한 낙천정과 이궁은 태종과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살곶이에서 화포 훈련 등을 행한 뒤 머문 곳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태종에게 있어서나 세종에게 있어서나 낙천궁은 단순한 이궁이나 누정이 아니었다. 천명을 알아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고 섬김과 배려함을 실천하며 보살핌과 위로받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천하를 소유하고도 참여하지 않지만 종사와 생민의 대계를 잠시라도 잊지 않는 태종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종 초 낙천정 이궁은 상왕 태종 정치의 산실이 셈이 된다. 반대로 세종에게는 상왕 섭정 체제이기도 하였다. 태종과 세종 측의 정치세력의 치열한 수 싸움이 읽혀질 법도 하지만 드러난 기록으로만 본다면 세종의 효에, 그리고 태종의 카리스마에 모두 가리어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의 한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노상왕 정종 ? 상왕 태종 ? 세종이 함께 어울리는 연회자리가 그것이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스로의 욕심을 절제한 태종이 천명을 알아 진퇴를 결단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樂天'의 즐거움을 누렸던 것은 아닐까? 낙천정을 보면서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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