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북치고 장구치고
김정숙의 북치고 장구치고
  • 성광일보
  • 승인 2017.03.1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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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봄
▲ 김정숙/논설위원

가는 걸음에 맞서는 바람이 만만한 플라타너스 낙엽 한 장을 깃털 밀듯이 밀어냈다.
“푸더덕푸더덕”, “휘리릭”거리며 꽁꽁 언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플라타너스 한 장에 겨울밤의 기운이 묻었다. 바로 보름 전에 이랬다.

봄이 왔다. 아니 우리가 봄에 왔다.
관념의 시간이 사람에게 오면서 겨울이 가기도 하고 봄이 오기도 했고 우리가 겨울을 떠나 봄에 오기도 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지구가 도는 동안 어지럼증 하나 느낄 수 없었는데 어느새 지구는 저 혼자 멋대로 돌고돌아 봄에 왔다.

지구와 달과 해와 온 우주가 봄에게 다가와 사람의 기운과 사람의 틀과 깡깡 언 아스팔트 위에서 어정대던 발걸음을 가벼운 깃털을 밀어내는 바람의 소리처럼 가볍게 했다.

유년시절 선생님이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골고루 있어서 축복받은 나라예요.“라고 해서 지구인이 겪는 4계절을 비빔밥 먹듯이 한 방에 누리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선생님의 4계절 축복얘기는 구라 같다.

젊은 시절에야 눈, 비가 내려도 산악 마라톤을 하고, 삼복더위에도 얼음 몇 알 오도독거리며 찬물에서 수영하면 더위도 이기고 추위도 이겼건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추우면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고 더우면 더워서 쪄 죽을 것 같아서 추울 땐 더운 나라가 부럽고 더우면 시원한 나라가 부럽다.

지금 다시 누군가가 “우리나라는 4계절이 골고루 있어서...” 어쩌고 저쩌고 한다면 쌍심지를 켜고 “너나 좋으세요!”라고 말할 거다.

글은 자신의 정서를 떠나지 못한다더니 요즘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나잇살 냄새가 진동한다.
그렇다. 이젠 중년이 되니 추워도 못살겠고 더워도 못살겠다.
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봄으로 시간이 순간 이동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겨울의 시간은 봄의 시간과 가을의 공간보다 느릿느릿 가는 것이 느림보 거북이 같았다.

겨울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11월 말이면 달력에 D-90으로 시작해서 감옥의 죄수가 석방될 날을 기다리는 D-day처럼 90, 89, 88... 로 봄이 올 날을 체크 했더니 친구가 세상에서 유별나게 사는 지구인은 내가 최고일거라고 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이상화 시인의 저항의식을 담은 시를 D-90일에 담았다면야 물론 내가 위대해 보였겠지만 그저 목숨 줄 연명하며 살기에도 버거운 내가 위대한 저항의식을 행동으로 실천할 리는 없을 테니 어처구니 없는 게 당연하다.

그저 내 눈앞의 처지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나로선 장하다.
여하튼, 보름 전 겨울 보내기 달력이 D-15였을 때 나의 글 메모가 플라타너스 낙엽 한 장이 깡깡 언 아스팔트 위를 달렸는데 드디어 D-Day에 봄, 그 봄이 왔다.

그 봄에 털 장화를 신고 터벅터벅 걸었던 한강 둔치의 잔디엔 쥐도 새도 모르게 푸른 냉이가 마른 잔디사이로 하늘을 향해 이파리를 활짝 벌렸다.

나처럼 겨울을 나느라 뼈가 시리고 손이 시렸던 중년의 아낙들은 강의 둔치로 시렸던 뼈와 손을 녹이려 강의 둔치에 왔다가 궁둥이를 하늘 높이 쳐든 채 냉이를 캐려고 코를 땅에 박았다.

겨우내 햇빛에 굶주린 중년의 궁둥이는 꿩먹고 알먹으며 비타민 D를 흡수중이다.
겨울은 늘 그랬다.
땅이 얼고 물이 얼고, 공기가 얼어서 나도 덩달아 얼었다.

얼어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빠지직거리며 깨지는 얼음장처럼 나도 조금만 삐끗하면 엎어지거나 부러지거나 할 것 같아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걷기도 뛰기도 밖에 쏘다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삼시 세끼 밥은 늘 먹는데도 겨울은 세끼 밥 중에 두 끼만 먹은 것처럼 에너지가 딸리고 생기가 딸리고 모든 것이 봄이 올 때까지 유보되어야 할 것처럼 칩거의 날이 많았다.

겨우내 겨울잠을 자는 동면의 동물처럼 나의 겨울도 동면의 시간으로 가득했다.
봄이 오면, 날이 따뜻해지면, 추위가 누그러들면 모든 것이 그때쯤 시작하면 일이 성사될 것처럼 유보의 시간이 많았다.

이제 D-90일이 지나고 동면에서 깨어난 나의 봄에, 우리의 봄에 나는, 우리는 그동안 유보한 일들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까?

한강 둔치의 나물을 캐는 아낙처럼 궁둥이 쳐들고 땅에 코 박고 시작해 볼까?
자전거 타는 날쌘 라이더의 페달 밟는 발놀림처럼 출발해 볼까?
드디어 봄이 왔다.
돌아온 들에 봄이 왔다.
또 다른 시작의 봄이 왔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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