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갑장 나리(2)
<소설> 갑장 나리(2)
  • 이기성 기자
  • 승인 2019.10.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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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한
김영한
김영한

늘씬한 키에 등판이 푹 파인 블라우스를 시원하게 걸친 그녀는 자칭 회장이라며 이 여행을 주선한 당사자라고 했다.
그리곤 지금부터 여러분은 한 식구가 되었으니 언니 오빠 형님 누나동생으로 부르자는 말에 우리는 모두 와르르 손뼉을 쳐서 화답했다.
이어서 총무라는 젊은 사내와 함께 승객들에게 아침 식사 대용으로 따끈한 백설기와 생수를 나눠주었다. 배식을 마친 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소음 때문에 분명하진 않지만 대충 듣고 보니'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미 걷힌 회비로는 남의 집 헛간에서 뒹굴지 않는 한 3박4일을 꾸려가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빠듯한 경비에 버스 기름값이라도 보태자면 부득이 몇몇 유수 기업의 상품전시홍보관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방문이지 실은 구걸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물건은 사지 않아도 돼요. 그저 상품전시관의 화장실도 볼 겸 이십 분쯤 다리 뻗고 홍보 강의를 듣다 보면 유익한 내용도 없지 않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존 거 아니겠어요? 그것도 아님 여행 준비에 밤잠을 설친 분들은 잠시 졸다가 손뼉만 몇 번 쳐도 나올 땐 쓸 만한 샘플과 홍보물을 잔뜩 안겨주니까 부담 없이 챙기세요. 거기서 권하는 상품을 사고 안 사고는 여러분 자윱니다.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시죠?”
회장의 말에 우린 또 손뼉을 쳤다.
그날 처음 들린 곳은 금산에 있는 홍삼 전시관이었다. 거기서 홍삼에 대한 강의를 듣곤 영농조합에서 염가로 준다는 홍삼 제품을 한 아름씩 산 사람도 있었으나 대개는 홍보물만 챙겼다.
오후에는 우황청심환으로 유명한 K 제약의 상품전시관을 들렀다. 그곳 홍보담당 이사도 자사제품의 우수성을 따발총 쏘듯 떠들어댔는데 들어 해될 건 없었다.
개그맨 같은 홍보이사의 강의를 재밌게 듣고 나오면서 그 회사의 로고가 찍힌 우산을 선물로 받았다.
오후 일곱 시쯤 울진에 도착한 우리는 허름한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서울의 웬만한 모텔만도 못한 시설이지만 지하 5백 미터에서 끌어올린 온천수가 유명해서 예약이 힘들었다는 말을 회장이 중언부언했다.
이어서 총무가 방을 배정하기 전에 남녀로 구분하여 한 방에 사오 명씩 합숙하라는 것이었다. 저렴한 회비 때문에 부부가 각방을 써야 한대도 누구 하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내게 배정된 삼층으로 올라가자, 육칠 명이 함께 써도 좋을 만큼 넓은 방에 네 사람이 벌써 와 있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잘 아는 듯 서로 왈형왈제하면서 입었던 옷을 벗고 간편한 복장으로 바꿔 입는 중이었다. 
이런 패키지여행이 처음인 나는 낯선 이들과 한 방에서 뒹군다는 자체가 몹시 불편했다. 그렇다고 혼자 불만을 토로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 잠자코 있었지만 코를 심하게 고는 나로서는 은근히 잠자리가 걱정되었다. 
화장실을 겸한 욕실에서 먼저 씻고 나온 이들이 각자 스스럼없이 편히 앉아 껄껄대는 동안 나는 긴장한 탓인지 자꾸 잔기침이 나와 신경이 쓰였다.
일 층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온 나는 창가에 붙어 어둠이 밀려드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때,
“이런 후진 호텔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인사나 나눕시다.”
실내에서도 옅은 색안경을 낀 사내가 옆자리를 터주며 말했다.
“노형은 하는 일이 뭐요?”
색안경의 말투가 투박하게 나왔다.
“뭐, 별로 하는 일이….”
글을 쓴다면 객쩍은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나는 말꼬릴 흐렸다.
“한마디로 백수로군?”
색안경의 말투가 사뭇 건방졌다.
“험, 형씬?”
나의 물음에 색안경은 기다렸다는 듯 명함을 내밀었다. 임 철한이라는 그는 직함이 K 전자의 대표이사였다. 나는 픽, 웃었다. 그가 번뜻한 회사의 사장이라면 그의 말대로 후진 호텔에서 굳이 나 같은 사람과 함께 뒹굴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저나 나나 도긴개긴인데 꿀릴 게 뭔가.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큰기침을 했다.
“거긴, 명함 같은 거 없소?”
“명함 가진 백수 봤소?”
건방진 그에게 나도 한껏 당돌해졌다. 문단 말석에 겨우 낀 주제에 번듯한 명함이 있을 리 없고, 또 있다 한들 이런 데서 마구 뿌리긴 싫었다.
“흰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폼이 제법 도사 같은데, 어디서 철학관을…?”
천방지축으로 질퍽대는 그에게 나라고 흙탕물만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전을 펼 만큼 눈은 밝지 않소만 뭐 궁금한 거라도 있소이까? 맹인이 제 앞은 못 봐도 남의 앞날은 잘 봐주듯 내 비록 까막눈일망정 거기 운세 하나는 똑 부러지게 봐주리다.”
나는 육갑이나 겨우 외는 주제에 겁 없이 떠벌였다. 그러고 보니 임 사장의 오뚝한 콧날과 준수한 이목구비에서 제법 귀티가 흘렀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까이하기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아니, 흉측한 칼자국을 감추기 위해 처음 턱수염을 기를 때부터 들어온 껄끄러운 야유에 새삼 시비를 걸 필요는 없었다.
“어쭈, 이 친구 말 펀치가 제법인데. 대체 어디서 명리를 배웠소?”
“건 천기누설이니 함부로 주둥아리 깔 일이 아니고, 어서 궁금한 거나 말해보슈. 가령, 잘 되던 사업이 어느 날 폭삭했다가 언제 또 불같이 일어날지 말이오. 보아하니 지금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만날 한 타령으로 지지부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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