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지 무렵
<수필> 하지 무렵
  • 성광일보
  • 승인 2020.01.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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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줄장미가 검게 시들어 담벽에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침 운동을 하는 체육관으로 향하여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아파트 화단의 검푸르게 변한 동백나무 잎도 엊그제 연녹색 반짝이는 잎 사이로 탐스럽게 붉은 꽃을 피웠던 바로 그 나무가 맞나 내 눈이 의심되었다.

체육관입구 보도블록에 늘여 놓은 청매실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청매실 효소를 담글 때가 돌아온 모양이다. 겨우내 기다렸던 매화꽃이 깊은 겨울잠속에서 깨어나 처연하게 꽃을 피우는 걸 얼마 전 보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저토록 실한 열매로 변하다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빠름을 다시 실감한다.

농사를 지은 저 농부는 매화가 지고 난 자리에 새 순이 돋고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풀도 뽑고 거름도 주었으니 토실토실 여문 매실이 현실이겠지만 나에게는 갑자기 다가선 신기루 같다.

해마다 하지 무렵 청매실을 수확하여 가져 오는 농부를 보며 내가 앞으로 얼마나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한 해의 주기가 짧아지는 듯 여겨지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겨울을 이겨 낸 새싹이 봉긋이 얼굴을 내미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특하다. 얼어붙었던 땅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순하고 보드라운 것이 올라오는 것일까?

올 봄에는 유난히 한꺼번에 꽃들이 다투어 피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전에는 매화가 곧 봄이 올 거라고 예고를 하고 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맨 먼저 봄소식을 전하고, 그 다음 목련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이어서 벚꽃과 살구꽃,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이 왔음을 노래하였다.

올해는 그런 순서도 없이 한꺼번에 모든 꽃들이 피어나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꽃이 피었구나 하면 어느새 떨어지는 꽃들이 안타까워 매일 밖으로 나갔다.

짧은 봄을 온 몸으로 천천히 느끼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리도 빨리 지나가 버리는지, 수북히 떨어진 꽃잎을 보며 땅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고운 색상의 꽃잎은 피워냈는가 신기하고 궁금하였다. 앞으로 이 봄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펼쳐놓은 청매실 자루 사이로 올망졸망 밤톨크기의 작은 감자도 보였다. 봄부터 비다운 비가 내리지 못하였으니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모양이다.

들녘이 타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을 적마다 창 너머로 흐르는 강물에 눈길이 갔다. 멀리서 바라보는 강물도 줄어들어 강 건너의 둔덕이 한 뼘은 내려간 듯하였다.

그냥 바다로 흘러가는 물을 막아 타들어가는 논에 급수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 혼자라도 물통을 들고 강물을 떠서 갈라진 논바닥에 쏟아 붓고 싶었다. 실천하지도 못 할 상상을 하니 문득 이맘때 모내기 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자운영 보랏빛 꽃이 구름밭을 이룬 논바닥을 아버지는 쟁기를 들고 갈아 엎으셨다. 쟁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보랏빛 꽃이 흙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무논에는 거머리도 많아, 아버지는 가끔 장딴지에서 아버지의 피로 검게 변한 거머리를 툭 떼어 보여 주셔서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논둑에 쪼그리고 앉아 논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바라보며 어서 논물이 그득 담겨라 하고 궁둥이를 달싹이며 바라본 하늘에는 도톰한 허리를 한 하얀 낮달이 걸려 있었다.

이름 모를 수초들이 우묵히 자란 농수로에는 넘칠 듯이 넘실대며 물이 흘렸고, 송사리 떼가 수초 사이로 숨어드는 수면위로 구름이 흐르는 파란 하늘이 잠겨 있었다.

내가 들고 간 알루미늄 주전자의 막걸리와 하얗게 분이 난 감자 몇 알을 새참으로 드시고 다시 무논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두고, 논둑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절대 농촌으로 시집가지 말아야지 생각하였던 단발머리 소녀는, 어느새 귀밑이 하얗게 변한 중늙은이가 되어 어린 시절 모내기를 하던 광경을 그리워하며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모내기를 하는 날은 새벽부터 잔치를 하는 듯 소란스러웠다. 검은 윤이 반질반질 나는 커다란 무쇠 솥에는 밥 짓는 하얀 김이 푹푹 솟았다. 나도 조막손으로 양파와 감자 껍질도 벗기고 오이도 씻고 마늘도 찧고 검뎅이가 묻은 부뚜막도 닦으며 부지런히 잔손질을 거들었다.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서 머리에 새참 광주리를 얹고 가면 멀리서 들리는 못줄 잡는 소리는 온 들판을 휘돌아 멀리 하늘까지 메아리치는 듯하였다.

무눈에 엎드린 아낙들은 구성진 노래 가락도 뽑고 우스개 소리도 하다가 툭툭 털고 논바닥에 앉아 우리가 이고 간 새참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 감자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졸인 갈치를 감나무 잎에 담아 돌렸다. 모내기를 할 때 논둑에서 먹었던, 붉은 고춧물이 베인 감자와 굵기가 실한 싱싱한 갈치조림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을 것 같았다.

모내기가 끝난 논에도 항상 할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셨다. 풀을 매는 아버지가 엎드린 논에 논물이 그득하고 벼 잎이 퍼렇게 자라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면 배가 부른 듯하였다.

때로는 비가 오지 않아 논바닥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한숨 소리와 함께 나도 애를 태우며 비가 오기를 기도하였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게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걸 철없는 그 어린 그 시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변하여 해가 갈수록 강우량이 적어지는 듯하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요즘 젊은이들은 물이 귀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설거지 할 적마다 타들어가는 저수지의 물이 떠올라 수도꼭지를 잠근다. 샤워를 하는 딸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채 하는 것 같아 물을 잠그라고 큰 소리를 쳤다.

물기를 털고 나오는 딸에게 요즘 가뭄이 심하다는 소식을 못 들었느냐고 잔소리를 하였더니, 순순히 잘못했다고 대답하는 딸이 참 예쁜 것은 고슴도치 엄마의 사랑일까 생각하며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짓는다.

이제부터 비누칠 할 적에는 물을 잠그고 아낄께요. 하는 딸의 등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더니 상큼한 비누냄새가 폴폴 났다.

정순이 / 수필가
정순이 / 수필가

◆정순이 프로필
·제3회 광진 문학 신인상 수필부문 수상(2013)
·광진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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