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언론(5)
민주주의와 언론(5)
  • 서울동북뉴스
  • 승인 2013.05.0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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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비전경영전략컨설팅 대표

 Ⅲ. 한국언론의 형성과 권력화 과정
 1. 메이저신문의 탄생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조·중·동)을 가리켜 한국의 메이저(Major)신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신문 시장의 75%를 장악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탄생 배경은 일제식민 통치하와 관련이 있다.

3·1운동은 일본이 형식적이나마 그들의 억압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그것은 한국 국민이 일본의 식민정책에 기꺼이 따르고 있다고 선전하던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졌고, 따라서 세계의 여론이 극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일본은 이에 헌병경찰정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하여 그들의 식민정책의 일부를 수정하였던 것이다.

새 총독 사이토 부임과 함께 표방한 문화정치란 대략 다음과 같다.우선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陸海軍大將)이 임명되어 오던 총독에 문관(文官)도 임명한다는 것이었다.헌병경찰제도 대신에 보통경찰제도를 채용한다는 것과 교육을 보급시켜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고,언론의 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을 한글로 감행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와 똑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 방법을 달리한 것 뿐이었다.우선 일본은 1945년 한국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명의 문관도 총독으로 임명한 일이 없었다. 또 비록 보통경찰제도가 되었으나 경찰기관은 오히려 확대되었고,경찰인원도 증가하였다.1948년 헌병을 포함한 경찰의 수가 14,358명이었는데 1930년에는 18,811명으로 증가하였다.한편 감옥은 증가되고 사상범도 증가하였다.그리고 그들이 선전하는 교육의 보급은 겉치레 뿐이었고 그 차별 교육도 여전히 심각했다. 한편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시대일보(時代日報) 등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로 된 신문이 창간되었다.

 가.조선일보(朝鮮日報)
조선일보는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동아일보,시대일보와 함께 허가한 신문으로 1920년 3월 5일 창간하였다.창간 당시는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에 발행을 허가하여 사장 조진태(趙鎭泰),발행인 예종석(芮宗錫), 편집인 최강(崔岡)) 등의 진용으로 출발하였디만, 항일적인 논조로 찬간 반년도 죄지 않은 1920년 8월에 민간지 가운데 최초의 정간을 비롯해서 1920년대에 4차례나 정간을 당했다.

1924년 9월 신석우(申錫雨)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이상재(李商在)가 사장, 신석우가 부사장,김동성(金東成)이 발행 겸 편집인, 그리고 이사진에 안재홍(安在鴻), 백관수 (白寬洙), 이상협(李相協) 등이 취임하여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경영과 제작에 혁신을 단행하였다.그 뒤 신석우, 안재홍,유진태(兪鎭泰), 조만식(曺晩植) 등이 사장을 맡았으나,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인수·운영하면서 부터였다.

금광재벌이었던 방응모는 신문경영을 맡은 후,총액 50만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태평로에 새 사옥을 짓는 등 과감한 사세확장을 꾀하였다. 또한 1934년 1월에 출판부를 창설하여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등 일반서적 간행과 함께 월간잡지 조광(朝光·1935.1), 여성(女性·1636.4), 소년(少年) 등을 발행하였다.한편 1929년 7월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한글보급반을 조직하고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해마다 이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의 ‘보나로드 운동’과 함께 문맹퇴치, 농촌계몽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강요로 신문 발행을 중단했다가 광복후인 1945년 11월 23일 복간하였다.6·25전쟁 때에는 방응모가 납북당하였고,그 후 장기영(張基榮),방일영(方一榮)이 경영을 맡기도 했다.

위에서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강요로 신문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일제가 어느 날 갑자기 총칼을 앞세워 신문사 문을 폐쇄한 것은 아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던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차원에서 일본 국내에서도 지방마다 한 신문사로 통폐합을 단행했고,식민지 조선에서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통합하였다.

조선일보는 폐간사에서 "더욱이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 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를 향한 충정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총독부와 협상 끝에 폐간 보상금으로 총독부 가관지인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 원과 80만 원을 받았다.동아일보도 보상금 15만 원,윤전기 매각대금 16만 원,총독부 시설 인수대금 51만 원 등 82만 원을 받았다.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 대의 값이 10만원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부면 든 돈이 얼마나 큰 돈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일제와 '합의폐간'했으나 자매지인 조광을 통해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친일 언론행위를 멈추지 않았다.조선일보는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성전이라고 했도 '조선일보'제호 위에 일장기를 넣어 발행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했다.사주(社主) 방응모의 행각을 보면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1937년)에 참여하는 한편,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1940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임전대책협의회 위원(1941년) 등으로 활약하면서 친일 활동을 하였다.

1948년 8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 잔재 청산 당시 친일파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1938년 조선명사 59인 각 도 순회강연, 1939년의 배영궐기대회 황군만세선창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통치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면도 있을 것이다.

  나.동아일보(東亞日報)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문화통치(文化統治)를 표방하면서 3개의 한국인 발행 민간신문을 허가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동아일보로서 1920년 4월 1일에 창간하였다.창간사에서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민족주의,문화주의를 사시(社是)로 내세웠다.초대 사장에는 박영효(朴泳孝)를 추대했으나,설립자 김성수(金性洙)가 중심이 되어 1921년 9월 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송진우(宋鎭宇)·이승훈(李昇薰)·백관수(白寬洙) 등이 8·15광복 전까지 차례로 사장을 역임하였다.

일제강범기에는 4차례에 걸친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고,1920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훈춘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조선동포 학살 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장덕준(張德俊)이 일본군에게 피살당하여 한국언론사상 최초의 순직자를 내기도 했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면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日章旗)를 말소시킨 사진을 실었다가 정간 당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1931년 11월에 월간지 신동아(新東亞),1933년 1월에 여성지 신가정(新家庭)을 창간하였고,1930년대에는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을 목표로 한 '브나르드 운동', 이충무공 유적보존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다.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의 강요로 폐간되었다.8.15광복 후인 1945년 12월 1일 중간(重刊)하였고,6.25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신문을 속간하여 당시로서는 전국 최고 부수를 발행하였다.1953년 8월에 서울로 복귀,1950년대에는 이승만(李承晩)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야당지가 되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는 발행 부수 30만부를 돌파하였다.

동아일보도 조선일보에 못지 않는 친일을 하였다.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연맹 산하 비상시 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총무위원(1943)·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결성 준비위원(1941.8),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10)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였다. 김성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요즘의 재벌이었다. 김성수는 일찍 사업을 했으며 한 때는 영국에 체류하면서 국제정세를 익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친일을 하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다.중앙일보(中央日報)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창간하였다.이미 이병철 회장은 라디오 서울방송(1964.5.9)과 동양TV를 개국하여 홍진기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있었다.당시 동양TV는 신세계백화점 한 구석에,라디오 방송은 태평로 동양화재빌딩에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동양TV와 라디오는 1년 후 신문사와 함께 쓰는 신사옥으로 이사했다, 이어 TV와 라디오는 합병되어 동양방송으로 발족되었다.

이병철은 중앙일보 창간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과 협의하였는데 박 대통령은 찬의를 표하면서 그 자리에서 홍종철 문화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9월 22일 창간하게 되었다. 결국 이병철은 통합매스컴을 갖게 된 것이다.

중앙일보는 의논을 거듭한 끝에 지면 편집의 지침이 될 사시(社是)를 정하였다.『①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 시킴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②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 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大經大道)를 촉구한다.③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관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自期)한다』고 되어 있다. 나무랄데 없는 사시다. 중앙일보가 사시대로 편집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언론은 춘추의 필법으로 사리의 정사곡직(正邪曲直)을 밝혀야 한다. 언론은 총검보다 강하다. 펜의 구사여하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언론은 양날의 칼이다.조중동은 양날의 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정의 쪽인가 불의 쪽인가? 생각해 볼 지어다.

◎브나로드 운동이란?
브나로드 운동은 민중계몽운동인데 그 정학한 설명을 보면,‘브라로드(Vnarod)’란 본디 러시아어이며 지식계급이 노동자 농민속에 뛰어들어 민중들과 같이 생활하며 민중을 지도하던 민중운동을 말한다.이 브나로드 운동은 조선일보사가 1929년에 여름방학 학생의 ‘문맹타파운동’이 크게 성공하였으며,동아일보사가 1931년 1월부터 주최한 한글계몽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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