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선생님 숨결
[수필] 선생님 숨결
  • 성광일보
  • 승인 2023.01.0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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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률/
수필가. 성동문학 회원

“선생님, 설 명절 잘 보내세요! 가까이 계시면 세배를 드리러 가야 할 텐데요.”

“뭔 소리여! 제자 목소리를 듣는 것만 해도 큰 행복이여. 새해에도 가정이 행복하길 바래.”

“선생님도 건강하시고요! 다음에 또 전화드릴게요.”

선생님께 내 수필집〈행운목 꽃 필 때〉를 보내드려서 그런지 ‘박 작가’라 부르신다. 설을 앞두고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연세가 80 후반인데 고향에 혼자 계신다.

6~7년 전, 고등학교 졸업 후 선생님 근황을 처음 접했을 때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가슴이 설렜다. 반 친구들과 연락을 해서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 당시 선생님은 사모님이 오랜 기간 요양병원에 계셔서 뒷수발하느라고 몸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과 서울에서 내려간 친구 10여 명이 모여 선생님이 평소 좋아하셨던 ‘붕어찜’ 집으로 갔다. 먼저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고 선생님은 제자들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어떤 친구는 자기가 영어를 잘해서 선생님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선생님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친구는 선생님의 어록(?) ‘순경에 주의하고 역경에 인내하라’라는 말씀을 선생님 목소리 버전으로 흉내를 냈다. 친구들은 학창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떤 친구가 의견을 냈다.

“어이, 일 년에 두 번 선생님 모시고 식사하세! 봄에는 고향에서 만나고 가을에는 서울에서 만나자고.”

친구 말끝에 내 생각을 말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으니 우선 봄에 한 번 만나는 거로 하면 어떨까? 정읍천에 벚꽃 필 때 선생님 모시고 강가를 거니는 것도 운치가 있지 않을까? 걷다가 힘이 들면 개천가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나누고….”

펄펄 끓던 주전자의 물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지 않는가. 한두 번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횟수도 더 늘어나리라 생각했다. 친구들이 웅성웅성하더니 내 의견에 동조했다. 이의 없습니까? 물었더니 “예”라고 했다.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손바닥으로 상을 3번 쳤다.

그 후 두 차례 만난 뒤 흐지부지되었지만 우리 몇 명은 선생님께 가끔 전화드리고,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누가 먼저라기보다 내 통장으로 금일봉이 들어온다. 돈을 모아서 ‘호접란’이 탐스럽게 핀 화분 하나 사고, 남은 돈은 우체국에 들러서 선생님께 현금으로 부쳐드렸다. 다음 날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박 작가 이게 뭔 일이여!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참말로 염치가 없네!”

“선생님, 선생님이 계시는 것만 해도 친구들이 힘이 된다고 합니다. 저희가 작은 마음을 모았습니다. 친구들한테 선생님 근황도 전할게요.”

“그려, 제자들한테 고맙다고 혀.”

친구들한테 선생님 근황을 알렸다. 친구들도 선생님께 가끔 전화했단다. 친구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송상열 선생님 목소리가 예전과 달라, 청년 같단 게.”

“맞어, 선생님 목소리 힘이 들어있어. 나도 그렇게 느꼈어!”

선생님이 처음에는 ‘사모님이 요양병원에 계셔서 그런지’ 만사가 귀찮은 듯 제자들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은 제자들을 만났고 제자들은 선생님과 가끔 통화했다. 그러자, 차츰 선생님 기력이 회복되고 목소리도 몰라보게 힘이 넘쳤다. 나는 선생님께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특히, 고향에 비가 많이 오고. 내장산 단풍이 들 때나 눈이 많이 온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접할 때 핑계 삼아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단풍이 들 때 “선생님, 내장산 단풍 구경하셨어요?”

“응, 단풍이 꼭대기는 안 들고 산 밑에는 겁나게 이뻐.”

정읍은 대체로 비가 많이 오고 눈도 많이 오는 편이다.

“선생님, 눈이 많이 왔지요?”

“그려, 내 생전에 올겨울처럼 눈이 많이 온 것은 처음 봤어. 병원에 혈압약 타러 가야 하는디 택시가 안 와서 오래 기다렸단 게.”

선생님은 ‘방송 리포터’라도 된 듯 고향 소식을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전화 목소리를 듣다 보면 선생님 건강이 좋은지 나쁜지 금방 알 수 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선생님의 건강한 숨결은 내 가슴에 따뜻하게 와닿았다. 거친 숨결을 들으면 내장산 단풍이나 벚꽃을 떠올렸다.

“선생님, 올해 정읍천 벚꽃은 어땠어요?”

“꽃이 환하게 피었어! 벌들이 꿀을 따느라고 윙윙거릴 때 벚꽃 터널을 걸어단 게.”

선생님과 통화하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박병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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