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 톺아보기(1)
광진 톺아보기(1)
  • 성광일보
  • 승인 2023.05.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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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시인, 한국예총 광진구지회장
장은수

광나루 위로는 아차산이 병풍처럼 지키고 있다. 오늘날 워커힐 호텔이 자리 잡은 광나루 북쪽 언덕에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숙박을 도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 오르면 한눈에 한강의 흐름이 다 보이고 백제시대 토성도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게 전망이 좋으니 광나루는 군사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 광진구의 역사
광진구 지역에 사람이 정착했던 때는 신석기시대다. 우리 광진구와 마주한 한강 건너에 암사동 선사유적은 6,000여 년 전 신석기 유적으로 그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집터 유적이다. 아차산의 남쪽 끝자락 배수지 운동장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이 출토되었다. 이후 광진구 지역은 마한·진한·변한의 삼국시대에서는 그 맹주국인 마한의 터전이었다. 마한 내의 작은 나라였던 백제가 성장하면서 그 도읍 하남위례성(현재 풍납토성)을 지키기 위해 한강 북안에 쌓은 성이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대적으로 수리한 백제의 책계왕 원년(AD 268)부터 역사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고대의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로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아차산성을 함락시킨 이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장악한 553년(진흥왕 14년)까지 삼국이 국운을 걸고 싸웠던 고대사의 현장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정종 때까지는 양주로,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부라고 불렸다. 당시 각 지방은 호족 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양주지방에서는 뚜렷한 호족 세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으로 이 지역이 점령된 후 고려왕조의 직할지가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는데 이곳은 국가의 군사용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마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어 임금이 수시로 나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에 속하였으며 해방 후 1949년 8월 13일 뚝도 출장소를 설치, 서울특별시에 편입하였다.
1968년 1월 11일에 뚝도 출장소를 폐지하고 관할 구역을 성동구 직할로 편입하였다가 1995년 3월 1일 성동구를 중랑천과 동이로를 경계로 하여 성동구와 광진구로 분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동 15개, 면적 17.06㎢, 인구 34.6만 명(2020년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차산의 어제와 오늘

◆ 광나루는 정치적·군사적 요충지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강을 가장 오랫동안 차지한 국가는 단연 백제다.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475년 수도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되면서 개로왕도 전사한다.
그 후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진흥왕의 배반으로 도로 신라에 빼앗기고 만다.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이 아내 평강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땅을 찾으러 전투에 자원했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극을 낳은 곳도 이곳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한강을 차지한 국가는 한반도의 패권국이 되었기 때문에 광나루는 늘 군사적·정치적 요충지였다.

◆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던 곳
아차산 주변과 광나루 근처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아차산에는 푸른 초원이 곱게 펼쳐져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도성 외곽을 대단위 목장 지역으로 활용했을 정도로 말 사육을 중시하는 국가였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도 나타나듯 국운이 융성하는 기운은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여 뛰노는'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조선의 말은 명나라가 선호하는 주요 무역 물품이기도 해서 특히 태종 시절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서 사육된 말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말 1만 마리를 조공으로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광진을 소재로 글을 쓴 시인은 삼봉 정도전으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 「진신도팔경시」에 비록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돼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관한 연구가 계속될 전망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가 나타날 수도 있다.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1410년 5월 10일, 금주(衿州, 지금의 시흥)를 목장에서 해제해 백성들이 농사를 경작케 하고, 1413년 3월 18일에는 민가의 땅 5백 결을 전관箭串 목장으로 흡수하였다고 한다. 땅 한 결은 요즘 단위로 보면 9,900㎡(3천 평)이니, 오늘날 495만㎡(150만 평)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국가 전략 차원에서 한강 남쪽 땅은 민가의 농경 생활을 위해 전답으로 활용하고, 한강 동쪽 광나루 쪽은 국가 기간산업인 목축을 발전시키기 위해 목장을 확대하였다.

◆ 시인 묵객들의 서정이 있던 곳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으며, 서거정(1420~1488)도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광진을 노래한 서거정의 시에서 보면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아차산 주변인 한양 동쪽 근교는 임금의 사냥터로도 애용되던 곳이다. 그런데 중종 이후에는 아차산에서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사라졌다.
『중종실록』 1541년 10월 11일 기록은 벌채가 심하니 이를 엄히 금하게 해달라는 상소 내용이다. 실록을 보면 문무를 겸비했던 조선의 국력이 이미 16세기 중반에는 급격히 쇠약해져 문에 치중하는 국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그 넓은 말 사육장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민가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이용하다 보니 짐승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양의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차츰 목장은 사라지고 많은 땅이 전답으로 전환됐다. 말 사육을 국가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생각했던 조선 사회가 점차 농경 사회로 발전해 가면서 유목민의 삶은 토착민의 삶으로 변화했다. 
광나루는 세종 때 삼전도가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물류 창고로 이용되던 뚝섬도 비만 오면 잠기는 바람에 지방에서 올라온 산물을 적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대신할 나루터가 필요했다.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는 광진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한강에서 광주·이천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이용하는 송파나루와 삼전나루 일대는 용산이나 서강, 마포처럼 도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물건들을 바로바로 하역해 적재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 상설 시장이 들어서면서 결국 광진나루 기능을 대부분 흡수하게 된다.

◆ 모윤숙毛允淑이 화양동 느티나무 근처에서 살았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쳐 서울 광진구 화양동의 저택에 모윤숙(1909년 4월 24일~1990년 6월 7일) 시인이 살았다. 호는 영운嶺雲. 화양동 느티나무 거목 세 그루가 버티어선 넓은 땅 단층 가옥에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문학은 물론 정치·외교·여성운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국 문단에서 모윤숙 시인만큼 파란 많고 굴곡 심한 인생을 살다 간 문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1910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이화여전 졸업 후 몇몇 여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시 동인에 참여하는 한편,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내고 문단에 데뷔했다. 광복 후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얼마간 이바지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제펜클럽에 한국이 가입해 한국본부를 창설할 수 있었던 것도 모윤숙이 홀로 이룩한 성과였다. 모윤숙은 이화여전 재학 시절만 해도 애국 시를 발표했다가 일경에 체포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으나 40년을 전후해 신문·방송 기자 일을 하면서 몇몇 친일 단체에 가담해 활동한 것이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 묵객의 은거와 풍류
서거정(1420~1488)의 시를 살펴보자. 서거정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서거정은 그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점복, 성명, 풍수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여 명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었다. 그는 70여 년의 생애 동안 거의 관직에 나아가,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관직 생활을 하던 도중 공무로든 사적인 관계로든 자주 광나루를 오가게 되었다. 당시 광나루가 가진 풍경이란 그가 항상 꿈꾸던 강호江湖의 세계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가 해 질 녘에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본 강 풍경에 대한 소감을 읊은 시에서 알 수 있다.
「날 저물게 광나루에 와서 말 세우고 배를 부른다.
물은 푸른 벼랑 아래로 감돌고 흰 갈매기 앞을 지나누나
강가 갈밭에는 흰 눈이 날리고, 
사당 앞 잣나무에 맑은 연기가 흔들린다.
해 질 녘 배 위에 앉으니 시詩心이 가볍게 떠오르누나.」

서거정은 이렇게 틈을 내서 광나루의 한적한 풍경을 시로 읊으면서 그는 당시 아차산에 있던 백중사伯仲寺에 찾아가 노닐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그 중 광나루를 건너면서 저 멀리 보이는 범굴사를 바라보며 지은 시에서는 부근의 아름다운 정경을 잘 그리고 있다. 
범굴사는 현재는 대성암으로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에 있는 절이다. 670년(문무왕 10) 의상이 창건하여 '범굴사'라 하였고, 1375년(우왕 1)나옹이 중창한 뒤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대성전과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그는 만년에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광나루 부근의 쌍수정雙樹亭에 자리 잡고 강호 생활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호 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했던 그는 성종 18년(1487년) 68세로 왕세자인 연산군을 위해 『논어』를 강하였지만, 이듬해인 1488년 6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광나루의 아름다움과 정취에 취하여 홀로 오가던 그의 모습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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