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영혼이 자본을 스쳐가는 순간
순수의 영혼이 자본을 스쳐가는 순간
  • 성광일보
  • 승인 2023.06.26 1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을 보고
김정숙/광진투데이 논설위원

자본주의가 낳은 현대사회의 병폐, 황금만능주의가 일상화되어 모든 인간관계가 돈에 얽메인 관계로 변해버린 시대에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우리의 심장을 보드라운 볼 살과 함께 사라졌던 순수시대로 귀환하는 기분이라고 하겠다.

소설이 원작인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2018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넷플릭스에서 두 번 봤다. 책의 등장인물과 디테일보다 영화에선 다소 축약되어 보여주고 있지만 건지 섬의 자연풍경, 장면마다 등장하는 낡고 오래된 것들의 친근함은 등장인물까지도 친근한 감성으로 이끌면서 관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 걸 우리는 옛것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 노스탤지어라고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의 팽창은 비인간적이고 폐쇄적인 상업주의로 팽배해 진다. 그리하여 자유 연상적 인간관계는 불가능해지게 되고 모든 인간관계는 돈에 얽매인 관계, 이해득실이 깔려있는 사회로 변모한다. 이 영화엔 현대인들의 삶에선 찾아보기 힘든 순수의 감성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대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중이었음에도 여타 전쟁영화에 비해 잔인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독일군이 소리를 지른다든가 돼지를 수탈해 가는 장면만 “적군”의 표식으로 나타날 뿐 심지어 영화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의 연인인 독일인 의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적군”이다. 전쟁이 낳은 상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영화 대부분의 장면이다.

영국의 건지 섬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게 점령당했는데 영국보다 프랑스에 가깝고 동 떨어져 있어서 사실상 영국의 방어는 건지 섬을 등한시하던 참이었다. 그런 연유로 건지 섬의 주민들은 5년간이나 독일의 점령하에 공포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는데 그나마 그 사람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건 “책”이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문학인의 모임은 마을 주민을 유대와 연대로 묶어 주었고 적군이 뻔히 진을 치고 있는 5년간의 생활에서도 견디고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연대는 구성원의 권리를 보호해주고 지독한 고통을 완화해준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도 책이 사람을 연결했다. 유대와 로맨틱, 휴머니즘, 평화, 위안, 치유, 순수, 가치, 정의로움, 용기, 노스탤지어, 이분법적 사고의 유연화... 영화 관람 후 이런 종류의 키워드로 정리된다는 건 책이라는 도구의 역할이 한 시대의 영웅이 해내는 역할만큼이나 소중하고 귀할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줄리엣과 도시 애덤스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은 건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소소하게 마음을 써주는 자세 때문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돈 많은 부자 마크가 끼워 준 왕반지에 덧붙인 벼락같은 청혼보다 더 단단히 이들을 묶어 주었다. 사이좋은 커플은 대화가 끊이지 않고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친교를 함께 한다. 줄리엣과 도시 애덤스도 좋아하는 것들, 책이라는 매체를 공유하였다. 또한 건지 마을에서 전쟁의 트라우마로 남은 “엘리자베스 찾기“의 과제는 마을 주민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요 엘리자베스의 딸을 키우고 있는 도시 애덤스에게는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어야 할 문제였다. 그런 숙제를 작가 줄리엣이 적극적으로 돕고 해결하였다

순수와 가치를 중시하는 작가 줄리엣의 역할은 마을 주민 모두에게 휴머니즘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모습을 본 남자 주인공 도시 애덤스에게 줄리엣은 매력적이고 강하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줄리엣의 눈은 건지 마을 사람들의 전후 고통을 해소시켜 주려는 욕망으로 빛나고, 그로써 전쟁의 심리적 심근경색으로 괴로웠던 건지 마을 사람들의 심장은 새것처럼 박동하면서 생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사랑을 쟁취하는 곳에 삼각관계는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그 클리셰의 구성 인물들이 어떤 캐릭터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지는 뻔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삼각관계의 두 남자 (마크와 도시 애덤스)를 통하여 자본과 순수의 저울을 스크린에 올려놓았다. 결국 여주인공 줄리엣이 순수를 택했다는 점에서 값(price)과 가치(value)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영화의 구체적 내용과 줄거리의 스포일러는 쓰지 않는다. 궁금한 분들은 실제 이 영화를 보시라. 아직 안 봤다면 한 번쯤 보는 걸 추천하고 한 번 봤다면 다시 보는 것도 추천한다. 혹시 아는가. 영화를 보는 순간만이라도 세월에 푹 파인 볼살이 순수의 볼살로 토실토실 해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