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를 찾아가다(3)
[소설] 나를 찾아가다(3)
  • 성광일보
  • 승인 2023.07.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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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당
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소설분과장
김근당

우리는 도내 예술제에 출품을 작품을 쓰고 그리기 위해 미술 선생님 집에 갔었다. 여러 달 전부터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 남아 연습을 했지만 정작 예술제에 출품할 작품 제작에 대한 지시가 없더니 선생님은 도구를 갖추어 집으로 오라고 했다. 붓글씨를 쓰는 나와 같은 반 친구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2학년 여학생 두 명과 3학년 여학생 한 명 이었다.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추석 음식을 잔뜩 얻어먹고 마당으로 나온 친구와 나는 갈색의 번들거리는 알밤이 탐나서 밤 따기 경쟁을 했다. 동산은 들어갈수록 깊고 어두웠다. 그 동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몰랐다. 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불현 듯 밤나무 사이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오던 소녀도 나를 보고는 움찔 그 자리에 섰다. 날씬한 다리에 잘룩한 허리, 볼록한 가슴에 하얀 얼굴이 예뻤다. 나는 순간 숲속에 핀 한 송이 목련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도 지켜보고 있는 나를 의식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미술 선생님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장대를 내던지고 미술 선생님 집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대청마루가 있고 그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문이 열러 있는 방이 있지만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자아, 도구를 챙겨 대청마루에 모이자”
우리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대청마루에 앉아 각자 작품을 만들 준비를 했다. 나는 대청마루의 제일 바같쪽 자리를 배정 받았다. 부엌과 'ㄱ'자로 꺾인 대청마루 끝과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넓은 나무 판들이 붙어 있는 부엌문은 사이가 넓어 보였다. 그 틈 사이로 하얀 원피스가 보인 것은 내가 벼루에 먹물을 잔뜩 갈아 놓고 머리를 들었을 때였다. 나는 무심코 김동환 님의 시 [산넘어 남촌에는]을 쓰려고 했다. 3절로 된 시가 내가 작품을 제작할 붓글씨의 본이었다.

나는 붓에 먹물을 묻히고 첫 번째 글자를 쓰기 위해 자세를 잡다가 문득 부엌문을 보았다. 그 순간, 부엌문 틈 사이로 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나는 한 소절의 글씨를 쓰고 머리를 들어 다시 보았다. 

소녀의 검은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해마다 봄바람은 남으로 오네.” 
또 한 소절의 글씨를 쓰고 머리를 들었다. 소녀의 눈빛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녀에게 가고 싶었다. '꽃피는 4월이면 진달래 향기.' 뛰는 가슴 때문에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다. 나는 3절까지의 긴 시를 어떻게 썼는지 몰랐다. 소녀는 부엌문 뒤에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정신을 온통 소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미술 선생님 집에 왔던 소녀가 누구지?”
나는 미술 선생님 집을 나오며 친구에게 물었다.
“아! 한선이? 미술 선생님 외 조카야. 우리와 같은 2학년이지,”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소녀가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나와 소녀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후 나는 선이만 생각했다. 왜 그런지 나도 몰랐다. 공부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선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등교할 때, 어쩌다 학교 담을 따라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오는 선이를 보고도 나는 어쩌지 못했다. 가슴만 콩닥콩닥 뛸 뿐이었다.

서울역 대합실은 중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몰랐다. 촘촘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긴 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 서성이는 사람들, 여기저기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복작거렸다.  

나는 사람들에게 휩쓸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겨우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도로는 차들로 넘쳐흐르고 어디를 보나 하늘을 찔를 듯 솟아 있는 건물들 천지였다. 어둠이 찾아오자 온갖 불빛들이 번쩍이는 서울은 무서웠다. 나는 광장을 배회하다 다시 역으로 들어갔다. 잠은 긴의자에 쪼그리고 누워 잤다.

다음 날 아침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차들과 사람들이 생기 있어 보였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얼마쯤 걸었는지 몰랐다. 도로를 건너고, 네거리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육교를 건너 걷다 보니 학교가 있는 주변까지 갔다. 나는 학교가 반가웠다. 주변에 자리 잡고 돈을 벌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였지만 고등학교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었는지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도 먹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먹은 것이 고작이었다. 간판은 북경반점이지만 들어가 보니 4인용 탁자 일곱 개가 놓여 있고 앞으로 주방이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주방에서 요리 하는 아저씨와 식당에서 손님을 받는 아주머니 둘이서 일하고 있었다. 손님은 다섯 명뿐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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