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드러눕는 비
옆으로 드러눕는 비
  • 송란교 기자
  • 승인 2023.08.0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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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논설위원
송란교/논설위원

갑자기 정전된 듯 사방이 온통 깜깜한 밤에 장대비는 어느 지역에 물 폭탄을 쏟아부을지 번개 보고 길을 안내하라 하는가 보다. 질러가는 길목에서 태풍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장애물이 듬성듬성 널려 있으면 자동차 경적(警笛)을 습관적으로 누르는 듯 천둥소리로 앞길을 정리한다. 굵은 빗방울은 그렇게 천둥 번개 앞세우며 어둠의 길을 뚫는다. 회오리바람이 일어 땅에 떨어진 비를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안개에 묻힌 이슬비는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 하고 어정쩡 휘날린다. 그러다가 목 긴 장화 속은 물론이고 속바지에까지 헤집고 들어온다.

먹구름 사이에 숨어 있다 불쑥 튀어나오는 앵두 알만한 우박도 가세한다. 한동안 머금고 있던 축축한 물방울의 무게를 더는 지고 가기 힘들다고 모두 풀어헤친다. 봇짐이 터진 것이다. 양수(羊水)가 터지면 아이의 울음소리 우렁차지만, 봇물이 터지면 동네 사람들의 악! 소리만 들린다. 누가 주룩주룩 사납게 날뛰며 밤새 우는 비를 달랠 수 있으리. 가로로 드러눕는 비, 차양 넓은 우산조차 수줍게 한다. 빗물에 불어터진 발가락, 축축한 신발 신기가 버겁다. 뽀송뽀송한 양말이 정말 그립다.

요즘 내리는 비는 아련한 추억이 서린 그런 순한 비가 아닌 듯하다.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고마운 비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어디에선가 왕창 두들겨 맞고 이곳으로 몰려와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에는 넓은 지역에 골고루 내리던 비가 이제는 화살이 되어 좁은 과녁을 바늘처럼 마구마구 찔러댄다. 어쩌면 피의 복수를 꼭 해야겠다는 기세로 덤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비는 그냥 순한 비, 땅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비는 사나운 비, 옆에서 옆으로 날리는 비는 안개비, 가랑비인들 어찌 밑으로만 내리려 고집 피울 수 있겠는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얹혀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浮萍草) 신세다. 그런 빗속을 뚫고서 100년 묵은 비단구렁이가 사람들 몰래 용이 되려 하늘로 오르고 있을까? 덩달아서 날개 없는 이무기도 하늘 높이 오르려다 그냥 미끄러지며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방(堤防)이 터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도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 외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반쯤 쪼개지다 만 산허리쯤에서 물난리에 놀란 황소는 황토물 뒤집어쓴 풀을 뜯는다. 날파리 초파리 쉬파리 똥파리가 눈썹에 앉아도 왕눈만 끔벅거린다. 불어난 물줄기를 타고 상류로 올라오다 낚시코에 걸린 붕어는 주둥아리만 뻐금거리고 있다. 아이코! 내 입이 방정이로구나 하면서 통곡을 하는 모양새다. 비를 벗 삼은 모기마저 허물어진 집안으로 쳐들어와 혈세를 내놓으라 수심 어린 종아리를 야무지게 물어뜯는다.

퉁탕 퉁탕 흙탕물이 들판을 무작정 가로질러간다. 둑을 무너뜨린 여세를 몰아 물갈퀴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길을 내고 있다. 줄을 서본 적이 없기에 뒤에서 밀면 미는 대로 그냥 냅다 앞으로만 달린다. 가로막는 자 용서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각종 농작물을 집어삼키며 구부렁길을 만들어 놓는다. 기다란 능구렁이가 사람들의 정성이 모자라 승천하지 못했다고 화풀이를 하는 듯 그렇게 으르렁대며 기어간다. 간짓대처럼 키 큰 옥수수 대를 무너뜨리고 잘 익은 옥수수마저 쓱쓱 훑고 지나간다. 아직 덜 자라 키 작은 들깨는 어이할꼬? 농부의 마음을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대로변 사거리에 만국기도 아닌 현수막이 나불거린다. 적당한 눈높이에서 길게 드러누워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다.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상대편 사람들 마음에 병이 생기라고 주문을 걸듯 화를 돋게 하는 글귀들이다. 바늘귀로만 하늘을 보려 하는 세상인심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름답지 못한 현수막의 글귀들로 하루의 시작이 상쾌하지 않고 하루의 끝이 고통스럽다. 예쁜 말, 맛있는 말, 격려와 위로의 말이 아닌 술맛 밥맛 오만 정 다 떨어지게 하는 말들을 훈장처럼 내걸고 있으니 말이다. 맛있는 말이 걸리면 하루가 행복하고 입꼬리도 살짝 미소 지을 텐데.

자연이 오만방자한 인간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럴 줄 몰랐다’라는 변명은 이제 그만하자. 지금부터는 우리 세대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일들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 발상의 대전환이 절대 필요하다. ‘내가 난 데’하는 교만과 자만이 아닌 ‘우리 다 함께’라는 겸손과 배려만이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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