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말하면 될 걸
[수필] 말하면 될 걸
  • 성광일보
  • 승인 2023.08.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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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순
수필가/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임길순
수필가/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살방살방 다가오는 겨울을 품에 안은 듯 온몸을 땅에 누인 향나무 앞에 차를 세웠다. 어설픈 잔꾀로 짐을 내려서 묵게 될 요사채까지 걸음을 아껴볼 요령이었다. 
이를 어쩐다지, 차를 세우고 앞을 보니 나무 옆에 수북이' 쌓인 김장 배추를 주지 스님과 공양주 보살이 다듬고 있었다. 

동지冬至로 가는 바짝 다가서는 햇살이라 다섯 시가 되어가는 산속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어둠 사이로 차갑지만 살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모처럼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동안거冬安居에 참여해서 주말에만 오는데 서너 걸음 아껴보겠다고 한 것이 하필 김장배추 다듬는 울력을 하는 바로 코앞에 차를 들이댄 격이다.
차 안에서 몸을 주춤주춤 머뭇거리다 살짝 내려 못 본 척 정해진 방으로 들어갔다. 스님과 보살은 배추 다듬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방에 들어가 방바닥에 앉으니 따듯하기 그지없다. 먼저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둥지를 틀었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밖으로 나오자니 문밖 추운 곳에서 울력하기는 싫고 따듯한 방에서 쉬고 있자니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이 불편하다. 이건 쉬고 있어도 쉬는 게 아니다. 방안의 대부분 사람은 배추를 다듬어 소금에 절이는 일을 온종일 했는데 배추가 어디서 또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는 이들도 있었다. 

울력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동안 저녁 공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났다. 하나둘 일어나 방에서 나가야 하는데 머뭇거리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밖은 어둑해져 있었고 다행히 다듬지 않은 배추는 두서너 포기밖에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8시부터 밤을 꼬박 지새우는 참선이 시작 되었다. 매주 토요일은 대원 큰스님의 [조주록] 강의가 있다. 조주록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사부대중이 모인다. 나도 그중에 하나다. 
산중에 겨울은 깊어가고 봄에 피어날 새싹들을 위해 맨발로 겨울밤의 냉기를 받는 나무들과 그를 따듯하게 비추는 별님들과 하나인 듯 아닌 듯 각자의 호흡을 쉬고 있는 사람들이다. 겨울밤에 나오는 별님은 아궁이의 불씨처럼 따듯하다.
아름다운 그림이다.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단전에 잠시 멈춘 뒤 숨에 이무엇고를 한다. 내가 태어났으니 지구별에 왔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나를 알고 싶고 내가 가야할 별을 모르니 모두 깨어있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지나간 장거리 운전에 대한 입력된 피곤함과 아직 오지도 않은 밤을 새워서 해야 할 참선에 대한 염려증만 없었다면 내 앞에 있는 닥친 현실 평상사 平床事, 배추 다듬는 울력에 동참했어야 했다. 뒤에 어느 도인이 내게 묻기를 무엇하다 왔는고? 라고 한다면 “배추 다듬는 일 하다 왔습니다.”라고 이렇게 깨어 있었다고 답하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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