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날 보고 당치도 않은 선비라니
[수필] 날 보고 당치도 않은 선비라니
  • 성광일보
  • 승인 2023.09.15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남승
수필가/전 소방서장
조남승

정월 대보름을 사흘 앞두고 입춘이 되었다. 올해는 이른 설을 맞이한 해라서인지 겨울이 짧게 느껴지고 봄이 성큼 다가온 것만 같다. 또 내가 사는 서울엔 겨우내 눈 한번 내리지 않고 차가운 겨울비만 간간이 내렸다.

겨울비 내릴 때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수치심도 없이 위선과 거짓으로 진실과 정의를 덮어버리려는 비양심이 난무한 나머지 잡스럽고 혼탁하기 이를 데 없는 현 세태가 마치 가을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내리는 겨울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겨울이면 겨울답게 함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내려 온 세상을 순백의 육화六花로 덮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입춘이 되도록 눈 구경을 한 번도 못 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비가 내리든 눈이 내리든 세상이야 어찌 되어가든 시간이 돌아가고 세월이 흐르니 새봄을 알리는 입춘이 찾아왔다.

예로부터 입춘을 맞으면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첩을 써 붙여 왔다. 나도 오늘 입춘을 맞아 누구나 즐겨 쓰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입춘서를 써서 현관문에 붙이고 들어왔다.

먹물이 남았으니 좋은 글귀라도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큰일이 났다며 TV 좀 보라고 성화다. 벼루 덮개를 덮어놓고 TV를 보니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환자가 지구촌 전체에 급격히 확산되어 세계보건기구인 WHO에서 국제적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한마디로 전 인류가 불안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실정이니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전국적으로 환자가 속출하면서 사람이 문밖출입을 자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잖아도 경제가 아주 안 좋은 실정인데 소비까지 위축되면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만 같아 걱정이 크다.

게다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정치권에선 여야 할 것 없이 오직 선거 준비에만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터라 사회가 더욱 뒤숭숭하기만 하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안정과 편안함이란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혼란은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개인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고 지켜가야 할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선비 정신이 퇴색되어 온 데서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선비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이없는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며 헛웃음을 웃게 되었다.오래전 어느 봄날 “충만한 삶을 위한 생할교양지 Tea&People"이란 월간지가 사무실로 배달되어 왔다.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차에 관한 책이어서 다소의 호기심이 생겼다.

잭의 첫 장을 넘겨보니 엽서 한 장이 있었다. 엽서엔 “선비님께" “선비님 안녕하세요? 따듯한 봄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따듯한 분들과 인연이 된 것을 저는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가게가 작은 문화잡지에 소게되어 부족하지만 선비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두 분 웃으시면서 읽어 주십시오. 배찬희 드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날 보고 당치도 않은 선비라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처럼,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지하매장에 짚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다소의 민속품을 전시한 가운데 '사람과 자연'이란 찻집을 꾸려가던 배찬희 씨야말로 본인이 선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나 같은 사람을 선비라 여겼을 것이다.

그는 부富를 좇기보다는 전통적인 녹차와 솟대, 그리고 황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우리의 문하를 전파하면서, 조촐한 공간에 은은히 퍼지는 차향을 품에 안으며 무한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참다운 선비였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그를 만나 녹차 한잔에 우정의 고명을 띄워 마시며 세속에 찌든 마음의 땟국을 씻어내 보고 싶다.
입춘을 맞으니 우리 문중의 큰 어르신인 조순 박사님이 생각났다. 어느 해인가 전통 유가儒家의 붓글씨로 '입춘우수立春雨水의 계절季節입니다. 늘 건승健勝하시고 공사간公私間 좋은 뜻 많이 이루시기 바랍니다.' '입춘일立春日 조순趙淳 공축恭祝'이라는 입춘 덕담의 글을 내려주셨다.

지금 보아도 단아하게 쓰신 글이 아주 짤막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이신 조순 박사님을 뵈올 때마다 자연히 숙연한 마음으로 모시게 된다.
조순 박사님께서는 한문학과 영어영문학, 그리고 동양고전과 경제학의 대가이시다. 어찌 보면 상반되는 것 같은 동양 전통의 정신 문화와 서양의 실물 경제를 중시한 물질문명, 그리고 한문학과 영문학이라고 하는 동서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신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대 학자이시다.

특히 학문적인 면만이 아니라 평소 댁에 계실 때에도 언제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항상 책과 더불어 신독愼獨의 생활을 하시며 늘 선비의 도와 예를 갖추고 지키는 학자의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그러기에 박사님을 뵈올 때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갖게 되어 '난향천리蘭香千里요 인덕만리人德萬里'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주 찾아뵙고 귀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배움의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한번은 자택에서 박사님의 자제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어른께서 출타를 하시게 되었다. 배웅에 나선 큰아드님이 얼른 신발을 신기 편하도록 놓아드리자 신발을 신으시면서 아드님에게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라고 감사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난 선비의 자세란 바로 저렇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