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달빛 재판(2)
[소설] 달빛 재판(2)
  • 성광일보
  • 승인 2023.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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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당
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소설분과장
김근당 소설가

김정수가 이상호를 덮친 장소는 정자에서 육칠 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최정 판사가 달빛을 탐문하기 위해 갔을 때도 경찰이 쳐 놓은 출입 금지라인이 그대로 있었다. 달빛은 은은하고 주변은 고고했다. 둥근 달이 하늘 한가운데 웃는 듯이 떠 있었다. 멀리 가까이 내려앉은 부드러운 달빛이 주변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주변의 작은 소리도 모두 다 전해 주고 있었다. 자연은 그만큼 진솔하고 달빛은 정직했다. 공판정에서 다투었던 시시비비를 다 품고 있는 달빛이었다. 형사소송법은 증거재판주의다. 제307조 1항에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한다고 직시하고 있다.

최정 판사는 증인이 있었다는 정자로 올라가 보았다. 정자는 땅바닥에서 나무 계단 다섯 개 위에 올라앉은 육각형의 아담한 모양이었다. 산길은 멀리까지 완만했고 달밤의 정자는 안온했다. 옛집에서 멀지 않지만 한 번도 올라와 본 적이 없는 정자였다. 앞으로 마을이 옛날 그대로 자리 잡고 있고 뒤쪽으로는 내천건너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정자 아래로 넓은 고추밭이 있고 고추밭 넘어 갯말댁의 작은 기와집이 있고 그 뒤로 중학교 입학 무렵에 아버지가 지었던 일자 지붕의 슬레이트집이 그대로 있었다. 

길을 따라 밭 사이로 더 올라가 있는 천 읍장(피고인 할아버지가 읍장을 지냈다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집 커다란 기와지붕이 보였고 기와집 뒤쪽으로 오동나무들은 더욱 커져 하늘을 속에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동나무 숲 뒤쪽으로 들판과 읍내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을 것이다. 왼쪽으로 훤히 보이는 곳 여기저기 나무들 사이에 전 씨, 조씨, 박 씨, 등등의 붉은 양철지붕 또는 기와지붕의 집들이 박혀 있고 맨 왼쪽 읍내로 나가는 곳에 이상호의 커다란 기와집과 마당가 언덕에 있는 오백 년을 살았다는 우람한 팽나무도 보였다. 그 위로 면사무소와 경찰지구대 광장에는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들판을 앞에 두고 있어 대체적으로 넉넉했던 마을의 삼십 여 채의 집들이 달빛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고향 풍경이었다.
피고인 천장수 측에서 변호사를 세 명이나 고용했다. 주간 변호사는 원로 법조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의 아내이자 증인인 갯말댁이 똑똑히 듣고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 측 변호사는 남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주장했다. 남편과의 성애에 미처 환상을 본 것이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변호사는 자신에 차 있었다. 증인의 증언은 허위이고 도굴 사건은 실체가 없는 허무맹랑한 고발이라고 변론했다.

피고인 천장수도 변호사의 변론에 고무되어 있었다. 이상호에게서 뒷일을 감쪽같이 처리 했고 고 박사도 그 방향의 박사이니 뒷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검사의 공소장에도 미진한 곳이 있었다. 이상호 일행이 도굴했다는 고분을 찾아내지 못했다. 김정수의 죽음에 대해서도 원인을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도굴을 비롯해(만약 고분을 도굴했다면) 다툼 현장을 목격한 달빛만이 알고 있을 사건이었다.

최정 판사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선고장을 집어 든다. 하얀 백지에 박힌 글자들이 살아나는 듯이 떠오른다. 고향 마을에서 벌어졌던 고향 사람들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사건을 맡을 때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최정 판사는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했었다. 기피신청을 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지방법원의 사정 때문에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재임 판사가 부족하고 다른 판사들이 이미 굵직한 사건들을 수임하고 있었다. 법원장은 사건의 실체가 소멸 될 수 있는 시간을 다투는 사건이고 새로운 역사를 정립하는 사건이니 젊은 판사인 당신이 맡으라고 했다. 최정 판사도 고향 마을의 역사에 주목했다. 거대 역사를 파헤쳐 고향의 새로운 역사를 정립하고 싶었다. 피고인과 증인을 누구보다 잘 알기도 했다. 인간적인 성향과 내면의 마음까지 . 그러므로 다른 판사들이 모를 진실의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고인도 고소인도 판사기피신청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유대가 있어 서로가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정 판사는 그런 갯말댁과 천장수를 바라보며 가슴이 아팠다. 인연 때문일까, 아니면 재판의 엄중한 책임감 때문일까, 어떻게 판결을 내리든 한쪽은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최정 판사는 그러므로 자신의 가슴을 파내는 심정으로 선고문을 작성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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