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남겨진 기억, 일상기록물 같은 소중한 선물 되다
세월이 흘러도 남겨진 기억, 일상기록물 같은 소중한 선물 되다
  • 이원주 기자
  • 승인 2023.10.26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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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희 화가 “고단한 시간을 돌아보니 내게 남은 시간들은 다이아몬드보다 귀하더라”

전옥희 화가의 유년기는 유명 화구브랜드와 전업 작가들의 작품에 둘러싸여 자연히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파랑새와 같았다고 한다. 격동의 시기를 거쳐 바라던 넓은 세상의 주역이 되는 대신, 그는 미술교사라는 커리어와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1인 4역을 30여 년 간 지탱해 왔다. 시간을 쪼개 작업하고 초대전, 개인전, 교류전만 해도 비공식전을 합해 총 4백 회에 가깝게 경험했으며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 그는 일기장을 꺼내듯 오래 전의 작품들에 새겨진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았다. 그림은 바쁜 삶이 잊히지 않도록 기록해준 달란트 중 하나이자, 시공간의 공존 속에서 탁 트인 명쾌함과 도형의 상징성, 화면분할의 카타르시스로 많은 이들의 박수갈채를 받게 해 준 행복한 무대였으며, 앞으로도 소중한 무대가 될 것이다. 부재의 허전함을 메워 줄 선물처럼 곁을 내어주는 전 화가의 따뜻한 작가정신과 그의 삶을 소개한다.

時間과 膳物 (2019)~울동네 time and the presents... 37.9x37.9cm, Mixed media

기억이 곁을 내주는 한, 지금의 일상은 보물 같은 기록물이 된다

은퇴는 또 하나의 데뷔를 의미한다. 30년 간 교직과 가정생활을 병행했던 전옥희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늘었다. 딸의 취업과 아들의 군입대 후, 5순위였으나 현재는 삶에서 50%의 비중을 차지하게 된 화가로서 말이다. 계명대 미대 서양화과와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은 뒤, 당시 명문고로 불린 대구남산고에서 교편을 잡고 붓 자국의 심상으로 추상화가의 명성을 쌓아 온 전 화가의 20년은 ‘세월(Time and Tide)’이라는 주제였다. 아크릴과 혼합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거친 질감으로 고단한 일상의 단편들을 나타내던 전 화가는 문득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월의 흐름 속에 떠나가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빈자리를 떠올리며 2015년부터 ‘시간과 선물(Time and the Presents)’로 작품의 방향을 틀게 된다. 시간에서 외줄타기 같은 고단함보다 선물 같은 개념을 느끼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의 청명한 햇살을 느끼면서부터였다.

캔버스 앞에서의 기록들이 언제부터인가 공평한 시간의 기록처럼 느껴지고, 지나온 기억은 애틋해졌으며 남은 시간들은 금보다 귀한 다이아몬드처럼 소중해졌다. 전 화가의 그림세계에서 연작을 한다는 의미는 일기장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날그날의 각기 다른 일상들은 같은 제목이었지만 색감과 주제, 그 무엇 하나 사람의 매일이 다르듯 모든 것이 같지 않았다. 도형으로 형상화시킨 일상은 지난 12월 16회 개인전인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 초대전 <시간과 선물 ~곁>과 앙코르 미니개인전인 호텔수성VIP라운지에서의 17회전에서 더욱 긍정적인 심상을 드러내고 있다. ‘~곁(Until Beside)’이라는 구절이 붙게 된 것은 지난 2월 코로나의 사상 첫 지역봉쇄나 다름없던 대구지역의 공황 상태로부터 왔다. 전 화가도 함께 겪었듯, 시민들이 3개월에 가까운 ‘집콕’을 견디면서 그로 인해 사람이 소중해지고 가족과 지인들이 있음에 ‘곁’의 존재감은 추상이 아닌 온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時間과 膳物(2022-5) time and the presents... 60.6x50cm, Mixed media

캔버스에서 중요한 건 비례, 삶에서 중요한 건 세상과 곁을 두기

전 화가는 지난해를 일컬어 10.26이래 도시 전체가 패닉에 빠진 두 번째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의 기억 속에서, 대통령 암살과 이어 발발한 쿠데타로 인해 국가비상사태가 발령되고, 한강다리 봉쇄와 저녁 7시의 귀가버스 통제가 새벽 2시에 풀려 시민들이 아비규환에 빠진 것을 직접 겪은 시간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는 공부와 그림을 잘 하는 딸이 타지에서 위급해질까 염려한 가족을 안심시키려 돌아갔고, 사범대학 미대의 특차와 장학금제도가 있는 계명대에 들어가면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코가 꿰여서’ 평생 뿌리를 박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2020년은 낯설었지만, 누구보다도 현실의 감성을 보는데 능했던 전 화가는 붓을 들어 알 수 없는 세상의 트라우마를 노스탤지어로, 그리고 카타르시스로 전이를 시켰다. 뒷산의 푸른 하늘도 개울도 현실에서는 잠시 거리를 두어야 했지만, 그림만은 얼마든지 자유로웠기에. 전 화가는 지난 해 대구아트페어, 포항국제아트페스티벌, 신조미술협회전, 청백여류화가회전 등 여러 전시에 참여하며 대구 시민들에게 그림으로 위로와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時間과 膳物~침묵과기다림II (2020-2) time and the presents... 162.2cm×130.3cm, Mixed media
時間과 膳物~침묵과기다림II (2020-2) time and the presents... 162.2cm×130.3cm, Mixed media

보이지 않는 비례와 공간감을 좋아하는 그는 기성품 캔버스 대신, 종종 서울로 올라와 천을 끊고 작품에 맞는 프레임부터 짜서 시작한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간의 각을 잡는 단계도 중요하게 여기는 전 작가는, 캔버스를 따로 제작하기에 180cm에 달하는 너비의 캔버스 작품도, 단일주제 추상을 200호 사이즈에서 펼치는 것도, 같거나 다른 비율의 캔버스 2-3개를 덧붙여 연작을 하는 시도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무채색, 브라운, 바다색의 배경에 세모·네모·원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고층건물 창문처럼 네모를 분할한 연작들은 작가의 시간과 열정이라는 입자들의 귀함을 보여준다. 한편, “감성이 여유롭고 삶이 충실해질수록 일기에 채울 내용도 늘어난다”며, 삶에 곁을 둔 여유를 만끽하는 전 화가는 세상과 멀어지지 않도록 신조어에도 관심을 보인다고 전한다. 시간이 아까워 항상 좋은 붓과 물감을 곁에 둔 채,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좋은 장면과 일상을 기록해두는데 몰두했었다는 전 화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위트가 넘친다. 2018년의 <시간과 선물-와이파이 여름>은 일본여행을 갔다가 서툴게 이은 와이파이가 끊어져 일행과 연락이 안 돼 헤어질 뻔한 에피소드에서 왔으며, 어느새 사람들의 욕구 1순위가 된 <여행>도 전 화가는 자신의 추억 속 파노라마처럼 기분 좋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붓터치로 감정을 담는 전 화가의 삶과 일대기가 더 흥미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일상기록적인 추상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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