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앨범 없애기
[수필] 앨범 없애기
  • 성광일보
  • 승인 2024.01.1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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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식
수필가/성동문인협회 이사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최운식 / 수필가

나의 서재는 삼익가구에서 튼튼하게 만든 책장이 여러 개 있다. 책을 넣는 칸에는 옆으로 밀어 여닫을 수 있는 유리가 끼워져 있다. 그래서 책에 먼지가 끼지 않을뿐더러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그 위에 서류 봉투, 문구용품을 넣은 쇼핑백, 기념패, 감사패, 서화 두루마리, 카메라 가방, 앨범 등이 수북이 쌓여 있어 지저분해 보인다. 이들을 둘 데가 마땅치 않으므로 책상위에 쌓아놓은 탓이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책상 위에 잡동사니들을 좀 정리하라고 하였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대답만 하고 그대로 지내왔다. 

삶의 노를 저어 세월의 강을 80여 년 달려오고 보니, 영원의 바다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상 위에 쌓아두었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할 때 참고했던 자료, 강의 자료, 방송 출연 자료, 설화 채록 원고, 해외여행 관련 자료, 편지 뭉치 등을 며칠 동안 검토한 뒤에 과감하게 폐기하였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의 필름에 찍어 인화한 사진을 정리한 앨범과 미처 정리하지 못해 책장 아래의 서랍에 넣어둔 사진들을 폐기하려니 만감이 교체하였다.

사진들을 살펴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사진이 한 장씩 있다. 그 뒤에 고등학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찍은 사진을 비롯하여 아내와 연애하고, 결혼하던 때에 찍은 사진이 이어진다. 삼남매가 자라던 때의 모습, 가정의 대소사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시절의 모습, 대학 교수가 된 뒤의 여러 활동, 크고 작은 상을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인다. 또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 삶의 일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이런 사진을 폐기처분 하는 것은 내 삶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진들을 폐기하려고 하나? 그 이유의 하나는 책장 위에 쌓여 있는 앨범과 서랍 속의 많은 사진을 폐기하여 80대 노인 주변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내 아들이나 딸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때 우리 부부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들은 선뜻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경우, 선친께서는 사진을 맣이 찍지 않던 시대에, 조금 사시고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사진을 한두 장밖에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95세까지 사시면서 많은 사진을 찍으셨고, 이를 정리. 보관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는 어머니의 앨범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이다. 이렇게 부모의 사진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내 사진을 내가 폐기하는 것은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정리해야 할 사진은 모두 1990년대 말까지 찍은 사진이다. 2000년대 초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찍은 사진은 파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USB에 저장해 놓았다. 이들은 인화한 사진처럼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을뿐더러 폐기할 때도 파일을 삭제하면 되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남은 세월 동안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지고 있는 사진을 모두 파일로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앨범의 사진들을 모두 뗀 뒤에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따로 놓았다. 

고를 때에는 기념이 될 만하고, 구도가 좋으며 초점이 잘 맞는 사진을 골랐다. 선택된 사진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파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이를 컴퓨터로 옮긴 뒤에 찍은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날짜를 적어 놓지 않은 사진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추정하였다. 그랬더니 사진 파일들이 날짜순으로 정리 되었다. 이런 작업을 한 뒤에 파일을 몇 시기로 구분하여 저장하였다. 

그 결과 꼭 보관하고 싶은 사진들이 시기별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사진을 떼어낸 빈 앨범을 보니, 두꺼운 판지에 비닐이 덮여 있고, 이를 철선으로 묶어 놓았다. 이를 그대로 버리는 것은 쓰레기 분리수거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비닐을 찢어내고, 이를 묶은 철선을 펜치로 끊어서 해체하였다. 그래서 종이, 비닐, 철선을 따로따로 쓰레기 수거 용기에 넣었다. 이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도 들었다. 이제 사진을 버리는 일이 남았다. 많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찢어 버리자니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나와 사진 속 인물의 몸을 찢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에 사다 놓은 수동식 서류 파쇄기에 넣어 부수자니. 일이 너무 많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불에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다. 

친척이나 친지 중에 아궁이가 있는 집을 알아본 뒤에 가지고 가서 태워야겠다. 책장 위에 얹어 놓았던 앨범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보니, 서재가 정돈된 듯하다. 컴퓨터를 키고 저장한 파일을 여니 어린 시절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차례로 펼쳐진다. 이 작업을 하는 며칠 동안은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내 삶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앨범을 없애야 하는 숙제를 해결하고 보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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