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보행
음주 보행
  • 송란교 기자
  • 승인 2024.01.16 11: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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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논설위원
송란교 논설위원

눈이 뽀드득 뽀드득 노래하며 쌓인다. 하얀 찹쌀가루가 시루 안에 차곡차곡 채워지며 단을 높여가듯 발자국 사이로 예쁘게 쌓인다. 사납게 질서를 무너뜨린 발자국을 덮어주고 싶어 눈은 그렇게 소복소복 쌓이고 고봉 고봉으로 담긴다. 물기 가득 머금은 눈송이가 내가 걸어온 발자국 위로 수북이 내리다 그친다. 아무도 상처 내지 않은 순백의 초원이 펼쳐진다. 주당(酒黨)들의 갈지자걸음이 헤집기 전까지는 온통 평화로움 그 자체다.

우르르 달려 나온 한 무리 개들이 미친 듯이 한바탕 놀아나니 볼품사납게 이지러진다. 술꾼들이 그 개들을 뒤쫓는다. 주인이 없으면 흥청망청하고 주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처럼, 옴팡지게 짓뭉개니 평화롭던 아름다움도 눈 녹듯 사라진다. 음주 보행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그려낸다. 맨정신으로는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음이다. 똑바로 걸어가려 하나 휘청거리는 다리는 골다공증과 친해서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술 깬 후 머리통이 깨질 듯 아프면 어쩌나, 그날 밤 긁어댔던 카드 전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큰소리쳤던 말들이 진수성찬이로다. 허풍만발(虛風滿發)한 초라하고 서글픈 기억,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또다시 만취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이스크림이 질서 없이 녹아내리면 맛도 상하고 체면도 구긴다.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한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내 맛 네 맛도 없이 부어라 마셔라, 고주망태로 한평생 다 보내면 어느 세월에 철이 들까나?

눈이 다시 내리면 고운 발자국 남겨보리라 다짐을 해보지만, 그 약속 믿어도 될까. 신년이 되니 청용(靑龍)의 기운에 깃대 의기투합하고 산뜻한 약속과 웅장한 계획을 굴비 엮듯이 엮어낸다. 맛있게 여물어야 할 터인데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일일(作心一日)도 못 넘기면 이를 어쩌나.

<음주 보행>이라는 자작시 한 수 공유합니다.

진실 한 잔에 목넘김 찌릿찌릿
거짓 두 컵에 정신줄 혼미혼미 
탐욕 세 병에 온몸이 비틀비틀
비난 말 술에 세상이 흔들흔들 

집에 가는 길이
 울퉁불퉁 데굴데굴
발딱 서고 벌떡 눕고
갈지자가 왠말이냐
왼쪽으로 굴러 쿵 
오른쪽으로 쿵 쿵 쿵 
자식들이 보고 있네 
해롱해롱 꾸벅꾸벅 
누굴 보고 웃고 있나 

오늘 한 잔 어때
그래 좋아 어디서 
어젯밤 그집에서 
좋아 좋아 좋아

전봇대로 베개 삼고 
뭉게구름 이불 삼고 
별빛으로 등불 삼고 
횡설수설 안주 삼고 
지갑마저 바람나고 
돌아갈 길 민망하네 
휘청휘청 휘영청 
보름달이 무겁구나 

음주운전 피했더니 
음주보행 따라온다 
휘청휘청 휘영청 
꼴딱꿀딱 딸국질 

옛날에는 성을 축조할 당시 공사 담당자의 이름, 직책, 담당 지역 등을 돌에 새겼는데 이를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 돌)’이라 한다. 먼 훗날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입안한 사람들의 이름도 굵게 새겨야 하리라. 국민을 위한 것인지 궁민(窮民)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지 후세에 꼭 물어야 하리.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책임이 따른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밤을 틈타 은근슬쩍 담을 넘어 타인의 방에 남긴 발자국이나 익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앞뒤 없이 쏟아낸 온라인상의 말들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리.

아름다운 마음으로 함께 걸으면 넓고 편한 길이 될 것이다. 길이 빛나면 따라오는 사람의 마음도 빛날 것이다. 말과 글이 빛나면 독자들의 얼굴과 마음도 빛날 거라 믿는다.

“야, 술은 마시는 게 아니고 퍼먹는 거라고” 시끌벅적 어깨동무하고서 한 무리가 지나간다.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비둘기들이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한다.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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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옥 2024-01-19 09:37:17
송시인님, 좋은글 멋진글 마주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송시인님 글을 보며 마음속의 울림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일 가득한 충만한 하루 만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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