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 송란교 기자
  • 승인 2024.04.0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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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논설위원
송란교 논설위원

한참 맛있게 잘 먹었던 시골에서 가져온 간장과 된장이 어느 순간 모두 바닥이 났다. 그래서 간장과 된장을 구하려 겸사겸사 시골에서 살고 계시는 장모님을 찾아 뵜었다. 여차하여 간장과 된장이 필요하다 하니 장모님께서 몇 해 전에 담은 씨 간장을 끓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양조간장과 장모님이 담아 놓은 간장은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그 깊은 맛을 알기에 장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울컥울컥 솟는다.

장독대를 호령하는 큼직한 항아리 속에 숨죽이고 있던 유난히도 까만 간장을 서너 말 퍼 올렸다. 그리고 마당 한쪽 구석에 다섯 말은 넉넉히 들어갈 큰 솥단지를 걸고 쏟아부었다. 장모님은 그사이 부엌에서 달걀 하나를 가져오시더니 간장에 띄우셨다. 수심 깊은 호수에서 백조 한 마리 떠 있는 듯 하얀 달걀이 둥둥 떠다닌다. 염도가 적당하다 하시니 저는 창고에서 깻대 한 단을 꺼내와서 부지런히 태웠다. 깨는 고소한 향기로 깻대는 뜨거운 불길로 아낌없이 제 몸을 내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갑자기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가 떠오른다. “자두연두기(煮豆燃荳萁 :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 어찌 이리도 급하게 삶아대는가)”. 콩이나 깨나 콩깍지나 깻대나 모두 제 몫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 듯하더니만 센 바람이 방향성을 잃고 이리저리 불어대니 기온이 푹푹 내려갔다. 바람결에 새털 같은 재가 날리니 솥뚜껑을 열어 놓을 수 없었지만, 펄펄 끓으면 넘칠까 하여 간간이 솥뚜껑을 열고 내 얼굴만한 나무 주걱으로 팔자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간장이 다려지고 나니 진한 맛을 풍긴다. 코가 벌렁벌렁 거리고 혀에 군침이 가득 고인다.

간장을 품고 있던 항아리 밑바닥에는 반짝거리는 결정체가 한 줌 쌓여있었다. 햇볕에 비추어보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 하얀 소금이 씨 간장을 토해내고 영롱한 별이 되고 있음이다. 아름다운 별 보듯 맛있는 간장을 오랫동안 황홀하게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소금도 그렇게 검은 간장으로 약이 되는 간장으로 거듭나려 몸부림쳤을 것이다. 검은 장과 그 밑에 가라앉은 하얀 소금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낸 밤하늘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흑백의 조화, 음양의 조화는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이다.

짠맛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서 간장과 소금이 도토리 키재기를 한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까만 간장은 그 짜디짠 맛을 만들어내고 혀를 사로잡는 그 맛을 품기 위해 그렇게 짠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것이다. 빛을 보지 않아도 빛난다. 약초 없는 약이다. 귀하고 귀하니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한 말 통에 가득 담았다.

불을 세게 지피다 보니 펄펄 끓어 넘치려 한다. 사랑도 욕심도 의욕도 넘친다. 인생도 저만치서 고부랑 고개를 넘어가려 한다. 씨 된장, 약 된장, 약 간장, 누군가의 애간장을 태우며 이리도 시커멓게 멍이 들었을까? 그 깊은 맛을 간직하기 위해 말없이 견뎌낸 세월이 그 얼마일까?

깻대 다 타고나니 하얀 재가 솥뚜껑에 슬그머니 내린다. 장모님은 노란 참깨 한 되를 까만 비닐봉지에 담고 계신다. 그 손길이 정답고, 그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참으로 고소하다.

선거 한 번 치르려 하니, 가면 속에 숨어 있던 위선들이 봇물 터진듯하다. 어디에 쓸 것인가? 예전부터 머릿속에 감추고 있었고 마음속에 단단히 묻어둔 것들이 벼락출세 좀 하려 하니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백주대낮에 온통 까발려지니 목불인견이로다. 봄을 맞이하여 도랑을 정비하려 막힌 곳을 조금 팠더니 왜 이리 썩은 내 진동하는가? 더 이상 맡고 있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고 봐 줄 수도 없구나. 이게 왠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다.

『예쁜 말 예쁜 미소 예쁜 인생』이 울고 있다. 『맛있는 말 한입 잡숴 봐U!』가 배고프다 하소연한다.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라는 후회가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글이 활자화되면 지울 수 없듯이, 말도 내뱉어지면 사라지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똑똑히 알게 되었으리라. 아직도 막말. 망말(妄言).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봄날에 좋은 씨를 뿌리려 노력하는 농부님네 마음을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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