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구멍가게와 마을공동체
<시론>구멍가게와 마을공동체
  • 김대영 기자
  • 승인 2015.12.07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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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기자

▲ 김대영/기자
작은 슈퍼를 하고 계신 외삼촌댁에 갔다. 상호는 ‘무진슈퍼’. 적당히 동네슈퍼 같은, 지극히 촌스러운 상호다. 가게 내부는 일반적인 구멍가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 위로 녹슨 진열대가 위태롭게 서 있고, 냉장고는 세월의 무게가 힘들다는 듯 비명에 가까운 소음을 자랑한다. 가게의 출납은 낡은 전자계산기와 검은색 다이어리가 담당한다.

이 별 볼일 없는 동네슈퍼에 꽤 독특한 서비스가 하나 있다. 한 어르신께서 냉장고를 한참 들여다보시기에 뭘 찾으시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맡겨둔 게 있어. 신경쓰지마” 어르신께서는 반쯤 남은 소주 한 병과 먹다 남긴 오징어다리를 꺼내 가게 안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어르신께서 ‘키핑(keeping)’해 둔 소주를 혼자 마시고 계시니 지나가던 다른 어르신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합석하셨다. 그렇게 가게는 순식간에 동네 사랑방이 됐다.

외삼촌댁에 있으면서 이런 광경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슈퍼는 어르신들만의 ‘마을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부터 정치 이야기까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만담을 나눈다. 출근하고 집을 비운 인근 주민들의 택배도 모두 이 작은 구멍가게를 거쳐 갔다. 슈퍼는 유통업체가 아니었고, 외삼촌은 상인이 아니었다. 그저 같은 동네의 이웃집이자, 이웃집 할아버지(외삼촌 연세가 일흔이 넘는다)였다.

깔끔한 상품 진열과 보장된 품질, 직원들의 친절한 응대에 빵빵한 냉난방까지 갖춘 대형마트에 비하면 외삼촌의 슈퍼는 볼품없다. 그러나 대형마트는 구멍가게처럼 커뮤니티 공간이 되지 못한다. 대형마트 한 가운데서 소주와 맥주를 들이키며 시끄럽게 떠드는 어르신들을 상상해 보라. 누리꾼들은 곧장 ‘무개념 노인들’ 따위의 딱지를 붙여 비난할 것이다. 또한 어떤 대형마트에서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하며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어르신들의 동네 커뮤니티는 아파트 입주자모임이나 부녀회와 성격이 다르다. 이 같은 모임은 아파트 내 최소한의 의사결정을 위해 불가피하게 형성되는 공적 모임이다. 물론 이 공적 모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사적 모임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구멍가게는 애초부터 사적이다. 입주자모임처럼 정해진 시간도, 의결해야 할 안건도 없다. 별도의 회비를 내는 공적 모임과 달리 무진슈퍼의 손님들은 오히려 공짜 반찬을 얻어먹는다. 제공되는 반찬은 수익 창출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다. 놀러온 이웃들에게 내놓는 간식거리일 뿐이다.

무진슈퍼가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이었다면 이런 작은 마을 공동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진슈퍼가 공짜 안주를 제공해봤자 팔려나가는 술병은 그리 많지 않다. 가게 코앞에 SSM이 들어온 이후 매출이 줄었지만 무진슈퍼의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탁자 앞에 둘러 앉아 재밌게 놀다 가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술병 하나 더 파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수많은 무진슈퍼들이 언제까지 마을공동체의 한 축으로 자리할 수 있을까. 구멍가게가 하나씩 폐업할 때마다 마을공동체도 그만큼 무너져 가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합리적 개인의 이윤 추구만을 인정하는 냉철한 경쟁사회에서 존중과 배려, 공생이라는 가치를 지닌 마을공동체의 개념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합리적 개인을 전제하는 경제학의 논리와 사람다운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공동체적 가치. 경제학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학문이 아니라면, 공동체적 가치도 경제학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가 될 2030세대가 존중ㆍ배려ㆍ공생의 공동체를 꾸려나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기적인 개인이 넘쳐나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욕망과 불안이 배제된 공간이 필요할 테니까, 우선은 구멍가게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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