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장 나리(4)
갑장 나리(4)
  • 이기성 기자
  • 승인 2019.11.1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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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한
김 영 한
김 영 한

나는 물었다.  
“저런! 언제 그런 수술을…?”
“이 개월쯤 됐어.”
“헌데, 이렇게 과음해도 돼?”
우리는 50도짜리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새로 또 소주병 뚜껑을 땄다.
“대작하지 않음 화를 낼라구?”
“그만해. 나도 어지간히 취했어.”
나는 술이 좀 부족한 듯싶었으나 그만 술판에서 물러나 구석에 누웠다. 
이튿날 아침, 나는 갑장의 푸념에 눈을 떴다. 
“와~, 그 실력 알아줘야겠더라.”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내게 그의 볼멘소리가 계속되었다. 
“자다가 천둥소리에 깨보니까 갑장이 코를 고는 거라. 그때부터 난 한숨도 못 자구 고문당했어. 그렇게 민폘 끼치려면 아예 딴살림을 차려.”
“예끼! 열심히 콧노래를 불러줬더니 칭찬은커녕, 타박이라니!” 
코골이 때문에 아내의 구박이 자심한데 남이야 오죽하랴 싶어 민망스러웠다. 그래서 어제부터 잠자리가 은근히 걱정됐는데 막상 면박을 당하고 보니 무안하기에 앞서 철면피가 되어버렸다.
“그냥 코만 골면 괜찮아. 죽은 듯 숨을 한참 멈췄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캑캑대는데 야, 정말 미치겠더라. 천정이 무너지는 건 고사하고 객지에서 팔자에 없는 상두꾼 노릇을 하는 거 아닌가, 걱정스럽더라니까.”
“좋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쏘마.”
약속대로 점심을 푸짐하게 낸 나는 그날 저녁을 대충 때우곤 살짝 호텔을 빠져나왔다. 찜질방을 찾아갈 참이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하고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 누군가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갑장이었다. 
“바람난 수캐마냥 왜 밤길을 헤매?”
“그런 자넨 바람난 암캔가?”
“눈에 안 띄니까 잠이 안 와. 객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가 싶어서.”
빈말이라도 갑장의 속내가 고마웠다.
“담배 한 대 줘.”
“피워도 돼, 중환자가?”
“주치의는 펄쩍 뛰겠지만 어쩌겠어? 한 대 피워야 잠이 올 것 같은데.”
“나 땜에?”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자.”
“코까지 골았으니 오죽했겠나? 저쪽을 쭉 돌아봐도 찜질방이 안 봬.”
“딴살림 차리랬다구 삐쳤군? 우린 미우나 고우나 한배를 탄 갑장이야. 부담 없이 재밌게 뒹굴다 가자고.”
갑장의 말이 고맙고 미안했다.  
“뚱보도 만만찮아. 무안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거기 하구 막상막하야.”
갑장이 들어가자고 팔을 잡아끌었다.
“먼저 들어가. 다들 잠들면 살짝 들어갈게.”

나는 3박4일 동안 그와 뒹굴면서 악담을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뭐가 농담인지 구분하기 힘든 육담을 남들이 들으면 싸우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가 주둥아리 닥치라고 하면 그는 아가리 닥치라고 대들었다. 그가 갑장 어른이라고 빈정대면 나는 갑장 나리라고 이기죽거렸다. 그가 내 자존심을 박박 긁으며 악담을 퍼부어도 밉기는커녕, 구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특유의 유머와 재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친구는 묵은 김치처럼 오랠수록 깊은 맛이 좋다지만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는 결코 시간이 좌우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얀 파도가 톱니처럼 해변을 핥는 모래밭에서 갑장은 말했다. 위험한 수술의 뒤탈을 무릅쓰고 이번 여행에 나선 이유는 깊은 속내는 모르지만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소탈한 인간미가 그리워서라고. 그런데 갑장을 만나서 고사리 꺾다 산삼 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건 피차일반이었다. 그와 한바탕 웃고 떠들면 왠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런 갑장을 보고 내가 느낀 점은 그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깔밋한 성품은 그의 매무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소 개량한복을 즐겨 입는 나로서는 이따금 넥타이를 매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갑장은 집에서도 넥타이를 맬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나는 택시에서 내린 갑장의 손을 잡고 물었다. 말없이 빙끗 웃는 갑장의 얼굴이 희미한 가로등 탓인지 꺼칠해보였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가 상가 끝에 있는 호프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거긴 안주가 부실할 텐데….”
처음 찾아온 그에게 겨우 닭다리를 대접한다는 건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오긴 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데로 안내하는 것이 갑장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고 예우였다.
“맥주 한잔 마시는데 뭔 안주타령?”
기름내가 확확 풍기는 호프집으로 성큼 들어선 갑장이 구석자리에 몸을 부렸다.  
“그래, 목이나 축이곤 바로 나감세.”
내는 급히 그의 잔에 술을 쳤다. 그리고 초췌한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갑자기 웬일이냐고, 늦은 시간에?”
“왜, 돈을 꾸러온 것 같아 겁나?”
“겁나긴? 꿔줄 형편이면 좋지. 대체 얼마나 필요한데? 집 담보해 줘?”
나의 희떠운 소리에 그는 목젖을 보이며 미친 듯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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