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줄탁동시(啐啄同時)
<수필> 줄탁동시(啐啄同時)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1.08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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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순 / 성동문인협회 회장
임길순 / 성동문인협회 회장
임길순 / 성동문인협회 회장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 길이다. 먼지가 낙엽보다 더 풀풀 거리는 건조한 산길이다. 일찌감치 몸을 낮춘 나뭇잎이 마른 땅을 덮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나갔는지 깡마른 잎이 반질반질하다. 발을 잘 못 디디면 미끄러질 판이다.

길이 두려울 때가 이때다. 길! 걸어 다니고 있지만 어떤 고리를 순환하는 운명 같은 것. 어디를 향해서 걷는다는 것, 한번 걸어간 길을 다시 걸을 것 같지 않지만, 그 길을 다시 걷게 되는 섭리.

나는 이미 길에 대한 두려움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못해 살금살금 내려오는 나와는 달리 두 아들 녀석들은 달리듯이 산을 내린다. 때맞춰 도토리까지 툭툭 떨어져 주니 신이 났다. 다람쥐가 양 볼에 도토리를 물고 가듯 놈들은 주머니 가득 주워 담아서는 서로에게 던져서 맞추기를 하느라 신이 났다.

금방이라도 널브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결국 나는 눈을 부라리다 회초리를 꺾어 들었다. 한 번만 더하면 가만히 안 둔다고 위협을 하고 3부자의 대장처럼 무게 잡고 내려오는데 등 뒤로 두 놈의 이야기가 들린다.

“형, 부처님은 거짓말쟁이다. 아까! 절에서 엄마가 부처님한테 절하면 소원 이루어진다고 했잖아. 그때 형은 뭐라고 기도했어?” 형은 말하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눈치인데 막내가 연이어 대답을 강요한다. “난, 엄마한테 혼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혼났잖아~” 아이고! 뒤통수가 가려워서 손에 들려 있던 회초리를 슬그머니 던졌다. 오늘 하루, 아니 적어도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만 이라도 참았어야 부처님은 거짓말쟁이란 소리는 듣지 않는 건데. 천천히 내려오면서 녀석들의 노는 모습을 가을의 풍경으로 봐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녀석은 한 수 더 뜬다. “아빠, 부처님하고 하느님하고 누가 힘이 더세?” 아이들은 넘어져도 많이 안 다칠 정도가 아니라 사내 녀석들은 넘어지기도 하며 자라야 한다고 내 잔소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남편은

“하느님이 더 힘이 세지.” 하며 약을 올린다.

입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우리 부부를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두 놈 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사립유치원을 4년씩이나 보냈다. 법당에 다소곳이 앉아 눈을 감고 기도하던 녀석들의 진지했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어쩌면 그리도 빨리 줄행랑을 쳤는지.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시(啐啄同時)란 공안(公案)이 있다.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차서 알 속의 병아리가 소리 내어 우는 것을 줄이라 하고, 그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맞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품고 있던 알 속에서 우는 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이며, 소리를 내는 알 속의 병아리는 어찌 어미가 그 소리를 듣고 탁 소리로 화답 해 줄 거라고 알 수 있을까. 두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 온전한 병아리가 될 수 있다. 생명이 탄생하는 환희의 순간이다.

이것을 선가에서 스승이 제자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할 때 비유한다. 어미 닭이 소중하게 알을 품듯이, 스승이 제자를 끊임없이 보살펴서 그 근기가 무르익었을 때 탁! 쳐주는 것이다. 제자는 그러한 시기가 올 때까지 오매불망(寤寐不忘) 정진에 힘써야 한다. 줄이든 탁이든 개체로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둘이서 찰나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스승, 제자, 진리가 하나가 된 자리다.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지만 숙세(夙世)의 업을 닦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인연이다.

이러한 인연이 선가에서만 있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고 세간의 모든 인연에서 이리된다면 그 경지가 화엄(華嚴)일게다. 세간으로 내려와 사랑을 기다리는 곳에 아주 작은 손길을 주는 일. 받는 이와 주는 이의 마음에서 그 순간이 빛난다.

아이들도 탯줄을 자르고 나올 때 ‘줄’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나오는 데 어미 된 내가 ‘탁’을 할 수 있는 준비기 안 되었다. 어미 닭과 병아리의 관계처럼, ‘적절한 때’가 중요한데 나는 오늘 그 시기를 놓쳤다. 병아리들은 준비되어 있는데 어미 닭이 소리를 듣지 못해 병아리들의 감성을 위해 공들인 하루가 공염불이 되었다.

내가 어디를 향해서 걷고 있는지, 산에서 내려오긴 했는지. 가을빛이 황홀한 산 중턱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미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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