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3)
<소설> 아테네 가는 배(3)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2.10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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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성동문인협회 고문

종식은 이상하게도 주하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자기도 데리고 가 달라고 조를 것 같아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다.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지면서 한편 짐스럽게도 느껴졌다. 걸핏하면 뒤로 나동그라지고, 높거나 미끄러운 데는 가지도 못했다. 남의 집에라도 가는 날이면 두 개 목발의 처리 때문에 난처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하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종식은 그를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단독여행을 좀 더 알차게 하자고 다짐했다.

그날 밤 샹베리역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끝내 주하는 종식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종식이 로마와 나폴리를 도는 동안 주하는 L시로 돌아왔고, 곧 종식의 출발을 알고서 부지런히 찾아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토 스톱을 끝없이 해 가며 또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오토 스톱을 하려는 사람이 길가에 서서 먼저 엄지손가락으로 방향표시를 한다. 다가오는 차의 드라이버가 방향이 같고 왠지 태워 주고 싶으면 차를 스톱시킨다. 그래서 자연 여자들이 차를 얻어 타기 쉽다.

그러나 주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언젠가 종식은 오토 스톱하는 주하의 모습을 먼 데서 바라본 적 있었다. 그는 아무 손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목발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한껏 빼내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손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여느 오토 스톱이 아니기 때문이다. 빈차가 같은 방향으로 가면 같이 좀 타자는 게 아니었다.

그는 주하식 오토 스톱을 하면서 어딘가 다니러 간 것이다.
야간기차가 알프스의 터널을 끝없이 지날 때, 종식은 주하를 생각했다. 밤에는 침대 칸이 되고, 낮에는 그냥 승객 칸이 되는 객차였다. 여러 개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위로 붙은 두 개는 선반으로 쓰이다가 그대로 침대로 되고, 밑의 두 개는 약간의 조작으로 소파가 침대로 바뀐다. 종식은 좀 조용히 잠자려고 위쪽 침대에 올랐다. 나머지 침대는 비어 있었다.

막막한 밤의 산악을 기차는 마구 내달았다. 어느 국경도시인지 꽤 오래 머물렀다. 등산복 차림의 여자승객이 하나 들어왔다. 금발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젊음이 풍겨 왔다. 흘끗 내려다본 종식과 흐린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비교적 눈동자가 검은 편인 이탈리아계는 아닌 듯했다. 이탈리아계는 몸집이 작고 어딘가 동양적이다. 그리고 궁기가 들어 보인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비해, 서독은 프랑스에 비해, 북구 제국은 서독에 비해 왠지 부티가 나 보인다. 금발도 더욱 흔해지고 눈동자도 점점 파래져 가고, 덩치들도 더 커 간다. 어느 나라 여자일까. 학생은 아닌 듯했다. 학생은 느낌이 단조로운 편이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때 묻어 있었다.

종식은 고개를 돌려 벽 쪽을 보았다. 언젠가 기숙사 방으로 찾아간 그에게 주하가 맥주를 낸 적이 있었다. 그의 방에 뚜껑 딴 맥주병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의자에 몸을 얹은 주하의 두 다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망막한 밤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진 이 낯선 나라로 질주해 가는 기차 속에서 왜 주하의 술 취한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을까. 방금 들어온 웬 침입자의 금발을 보고 그때 주하가 말한 금발의 여학생 엘리자베드가 연상되어서일 듯했다.

종식은 그날도, 그 뒤로도 엘리자베드라는 금발 여학생을 보지 못했다. 주하는 종식 앞으로 잔을 내 밀고 맥주를 가득 부었다. 술을 마신 탓만이 아니라, 그는 좀 흥분해 있었다.
“형님이 이 잔을 단숨에 비우면, 나도 울지 못해 형님에게 들려드릴 말이 있습니다.”

알프스가 문 앞인 이 깊은 산악도시 대학 기숙사촌의 밤은 고요히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주하, 왜 갑자기 동화 속의 소년 꼴이오? 누가 다녀가기라도 했소?”

종식은 그의 들뜬 마음을 쓰다듬기 위해서라도 잔을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알 만한 목소리들이다. 모두 불어권 나라에서 모여든 학생들이다. 꼬뜨 디브와르에서 온 피에르, 세네갈 여자와 프랑스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마르가레트가 돌아오고 있었다.
“형님, 들어오시다가 조그마한 금발 하나 못 보셨어요?”
“금발? 금발이 어디 하나둘이라야지. 절반은 금발인데…….”

종식은 복도에서 조금 전에 '조그마한 금발'을 본 것 같기도 했고 안 본 것 같기도 했다.
“걔가 내 여자친구 엘리자베드입니다.”
“언제 그런 꼬삔느(여자친구)를 두셨소?”
“목사님이 소개해 주셨지요. 이런 점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낫습니다.”
“가톨릭은 또 어떤 면에서 좋고?”

“이 사회를 몇 천 년 지배해 왔고,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계층은 역시 가톨릭이지요. 내가 프랑스 구경을 하게 된 것도 한국에 온 어느 신부님 덕택입니다.”
“그게 주하와 무슨 관련이 있소? 신부와 목사가 적당히 엇갈리누만.”

종식은 그에게 잔을 권했다. 주하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금방 또 돌렸다.
“관련이 큽니다. 크지요. 신부님이 나서면 엔간한 취직자리는 가능하고, 또 장학금도 쉬워집니다. 이 바닥에서 목사들은 아직 뿌리가 없어요…….”
종식은 주하가 유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용산 어느 시장가 동네에 사신다는 홀어머니한테서 향토장학금이 오지 않는 지 7년이 된다는 주하였다. 그는 이 바닥 어디에선가 불구 외국학생들을 위해 나오는 가느다란 돈줄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닥 지팡이에 흐느적거리는 두 다리를 매달고서.
홀어머니가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천신만고 끝에 학위논문까지 발표한 그가 아닌가. 새삼스러운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금발아가씨가 다녀갔단 말이오?”
“그 애가 자기 어머니까지 끌고 왔더라니까요.”
“뭣 하러? 금발은 몰라도, 금발 어머니 같은 여자는 못 봤는데…….”
“어머니는 먼저 나갔으니까요.”
“뭣 하러 왔었소?"
“거참!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는 겁니다.”
“뭐요!”
종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신불수에 경제력이 전혀 없는 주하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인도 아닌 유색인 아닌가. 일본인 아닌 모든 동양인들은 구석으로 내몰리는 천덕꾸러기밖에 되지 못하는 이 땅이다.

의자에 앉은 주하가 지팡이를 짚지 않고 장소를 옮기는 꼴이란 가관이다. 엉덩이에 힘을 주면 의자는 기이하게 옴찔옴찔 앞으로, 뒤로, 옆으로 움직였다. 주하는 벽 쪽으로 의자를 움직여 갔다. 벽을 따라 설치된 라디에이터 위에 무슨 꾸러미가 하나 얹혀 있었다. 주하는 그것을 풀어 헤쳤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엘리자베드, 아니 엘리자베드 어머니가 갖구 왔습니다.”
그는 좀 초조해하는 표정이었다.

“뭐요, 그게?”
꽤 구지레해 뵈는 옷가지들이었다.
“내가 추워 보인다고 가져다준 옷들입니다.”
“청혼한다면서 무슨 냄새나는 헌옷이나 가져다줍니까?”
종식은 말하고 나서 조금 후회스러웠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뱉어 놓은 것 같았다. 과연 엘리자베드라는 금발 처녀가 그녀 어머니와 함께 다녀갔을까. 부쩍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주하는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종식은 그녀들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언저리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눈 닦고 보아도 헌옷보따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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