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7)
<소설> 아테네 가는 배(7)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4.0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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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그래서 그는 동포 유학생들과 소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위해 뛰느라 그의 귀국이 늦춰지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들과 무관하거나 무관해질 수밖에 없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사실 L시에 와 있는 동포는 누구든, 황해 진남포 앞바다 외딴 섬에서 결핵환자들을 둘보고 있을 주하 아버지의 근황을 알아낼 수가 없다. 주하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자기 삶의 여건에 대해 어떤 무언의 획책을 시도하고 있는가.

저주받은 자신의 불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랄 만한 삶의 획책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엘리자베드이다. 결혼도 안 한 저 아름다운 금발아가씨가 주하를 부축하는 모습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주하, 너는 무슨 마술을 그녀에게 걸었단 말인가.

종식은 갑판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 댔다. 바람이 분다기보다 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으니 바람이 거칠게 불어 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올 것이다. 어둠이 가득한 갑판 위에는 등산용 침대 속에 들어간 젊은이들이 가득히 누워 있었다. 그들은 전장에 쓰러진 수많은 병사들의 주검처럼 보였다. 종식은 속으로 흑 하고 흐느꼈다. 놀라움 때문이었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뱃전에 서 있었다. 그들은 옷깃을 꼭꼭 여몄다. 바람 탓이었다. 어둠에 가려진 밤의 지중해가 은밀한 호흡을 감춘 채 서편을 향해 줄달음질쳤다.  

종식은 누운 사람들의 틈 사이를 골라 밟으며 선미 쪽으로 나아갔다. 지중해의 밤바람을 한껏 쐬어 보고 싶었다.
긴 다리들 사이를 용케 걸어 나가다가 종식은 특이하게 앉은 자세를 한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러러보는 사도의 자세였다. 검은 옷을 입었는지 어둠이 겹겹이 처발라져 있었다. 뭔가를 기원하고 있는 듯했다.

선미에 서니 바람소리, 엔진소리, 물소리가 고막을 메워 왔다. 잠을 뿌리치며 갑판을 어정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엘리자베드였다. 그녀는 기도하는 자세를 풀고 그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는 종식에게로 다가왔다. 흐린 갑판등의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는 잔잔한 웃음이 배어 있었다.

“피곤할 텐데 왜 자지 않으시오?”
그녀의 머리털이 바람에 나부껴 종식의 얼굴을 간질였다.
“기도하기 위해서죠.”
“무슨 기도요?”
“주하를 위한 기도예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고.”
“주하를 위해?”

그녀는 주하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온 지 3년은 된다고 했다. 주하의 소망이 무엇인데 그렇게 오래전부터 기도해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오히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 주하가 가장 따르는 당신이 그걸 모르냐고 되물었다.

엘리자베드의 조부는 퇴역 외교관으로 지금은 연로해서 불가리아 남동부 흑해 연안의 별장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주 그리스 대사를 무려 7년이나 지냈다고 했다. 할머니가 그리스계여서 자신의 가족은 불가리아인과 그리스인의 피가 반반씩 섞여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할머니의 고향 테살로니키에 가면 친척들이 살고 있어요.”
“테살로니키는 알렉산더 대왕 때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아닙니까?”
“북그리스의 중심도시죠. 아름다운 에게해를 바라볼 수 있는 항구도시예요. 바쁘시지 않으면 같이 가세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를 맞으러 지금 테살로니키에 내려와 계세요.”

종식은 웃음으로 싫지 않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종식은 그녀의 조부모 고향이 테살로니키라면, 그리스계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 종족과는 다른 슬라브계 마케도니아 종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들은 북그리스 트라키아 지방에 흩어져 있는 불가리아계와 또 다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인접국가와의 변경지대에서는 종족의 혼혈이 야기되기 마련이지만, 북그리스의 경우만큼 여러 민족의 피가 뒤엉킨 경우도 흔치 않다. 그리스인, 터키인, 알바니아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슬라브인들이 끈질기게 엉클려 내려오고 있다.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에 공용어가 무려 네 개나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어, 터키어, 알바니아어, 아르메니아어가 그것이다.
특히 그리스인과 터키인들의 항쟁은 숙명으로 맺어진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투쟁이었다. 전쟁에 이긴 편이 진 편의 성인 남자들을 몰살시킴으로 해서 피의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북부 사이프러스 터키계 종족의 독립 선언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서구문학의 원전이라고도 불리는 호머의 일리아드도 결국 그리스인들과 소아시아에 살던 터키계 트로이인들과의 항쟁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자그마치 기원전 3000년 무렵의 이야기이다.

트로이라는 나라가 소아시아의 힛사를리크 언덕 위에 존재했음은 실리만의 발굴로 확증되고 있다. 그러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트로이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은 의심받고 있다. 뚜렷한 사적 증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머의 일리아드가 상상력의 소산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트로이전쟁의 사실 여부가 모호하므로 호머의 일리아드와 전쟁 자체가 안고 있는 갖가지 전설은 더욱 소중한지 모른다. 

엘리자베드의 조부가 동남단 불가리아의 흑해 연안에서 산다면 트로이의 유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종식은 이 트로이의 유적지에도 가 보고 싶었다.

엘리자베드가 한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종식은 그녀의 족보를 역사적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와 주하의 놀라운 관계에 그녀의 족보가 무슨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역사학자는 민완형사보다 더 예민한 후각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논문 지도교수는 늘 이야기하곤 했다.

“그럼, 불가리아어나 터키어도 조금은 하시겠습니다.”
“그야, 거기서 자랐으니까요.”
“그런데 왜 프랑스로 이민을 갔지요?”
“이민을 간 게 아니에요. 파파가 파리 유학을 갔고 엄만 파리잔느니까요. 그래서 거기서 눌러 살게 된 거죠.”
“주하는 어떻게?”
“교회에서 목사님 소개로.”
“그는 지금 뭘 하지요?”
“객실로 오르는 계단에서 떨어져 목뼈가 아프다고 누워 있어요. 잠이 들었어요.”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주하의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고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주하의 소망,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불구를 정상의 몸으로 만드는 게 그의 가장 절실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아마비를 4살 때 앓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의사로 둔 그가 소아마비를 앓아 저 꼴이 되 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소망은 어쩌면 불구의 몸이기에 정상인들과 겨루어 정정당당히 학위를 받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벌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아무리 불구의 몸이라 해도 그까짓 학위 하나 받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드와 이굉석 씨를 깊이 울린 주하의 소망은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 서려 있는 듯했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리 급하지 않다고 했다. 그럼, 무엇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해드리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실현성이 없다. 극도의 폐쇄주의 사회 북한에서 그분이 머나먼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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