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4)
<소설> 아테네 가는 배(14)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7.29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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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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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멎은 곳은 언덕배기였다. 아테네 시가지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시가지 한가운데 아크로폴리스가 솟아 있었고, 사진으로만 보던 파르테논신전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스인들이 축성한 수많은 신전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온 나라 안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신전에 살았던 신들의 특징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 미움, 노여움, 선망, 그리움의 감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 신들은 영생하고 자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어 물체가 될 수도 있었고, 또한 동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들 신들은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삶을 인간과 같이하는 인간적인 신들이었다.

“종식, 아테네란 도시 이름에 무슨 뜻이 있다던데요?”
이굉석 씨의 질문이다. 종식은 자신이 일행에 끼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대략은 알지만, 신화는 역사의 영역이 아니오.”
대답을 하고 나니 잘한 것같이 새삼 생각되었다. 역사는 현장의 검증이지 형이상학적 세계의 추구는 아니다. 종식은 역사학자인 자신이 모든 역사적 기록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답답했다.

“그 아는 것만이라도…….”
“글쎄요. 신 중의 신 제우스에게는 아내와 딸 셋, 아들 넷, 여동생이 둘 있었지요. 아테나는 세 딸 중의 하나로 지혜와 싸움의 여신이었소.”
“지혜와 싸움의 여신……. 우리 약방에 가면 박카스라는 게 있는데 그것도 무슨 신 이름이라면서요?”
“그렇소. 일명 디오니소스라고도 하는데 포도주의 신, 술신인 셈이죠.”

주하와 종식은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박카스'라는 말에 따라 웃었다. 주하는 재미있다면서 열두 신을 다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그러나 종식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신화는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고 있어서 답답했다.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여신 중의 최고 여신이고, 딸들 중에는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있었다. 네 아들 중에는 태양의 신 아폴로, 나그네의 수호신 헤르메스, 화산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군신軍神 아레스가 있었다.
“나그네의 수호신이라…… 거 참, 좋은 신이군요.”

주하는 목발 위에 온몸을 완전히 걸쳐 놓고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왜 주하는 나그네라도 되오? 난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이 더 좋아지는데, 아프로디테가.”
그들은 주하와 종식의 얘기를 알아듣지 못했으나 '아프로디테'라는 말에 하하거리며 박수를 쳤다.

“신화가 역사보다 훨씬 재미가 있군요.”
주하의 대답이다. 마라차는 그들의 분위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건너다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덕 위에는 파르테논신전이 태양빛 아래 찬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둔덕이 프닉스 언덕이고, 저기 시가지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보이는 저 둔덕이 리카베토스 언덕이오. 아테네는 키피소스강과 그 지류인 일리소스강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이 언덕이 아크로폴리스 언덕이죠. 저기 파르테논신전은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살던 곳이고, 파르테논이란 말 자체가 '처녀의 방'이란 뜻이지요.”
종식은 아테네 여행을 위해 익혀 두었던 지식을 대략 늘어놓았다. 그의 신통찮은 불어였으나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모이강은 어딨습니까?”

주하는 먼지를 뒤집어쓴 듯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시가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금방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던지는 시가지 풍경이었다. 주하는 자신의 질문에 도취해 있는 듯했다.
“시모이강이라니? 아테네에 그런 강 이름은 처음이오…….”
“전사한 트로이 왕자의 아내가 이곳으로 붙잡혀 와 만들었다면서요?”
“아, 네, 알겠소. 하지만 그건 전설이오. 저기 저 파르테논신전에서 살았다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여기 이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처녀성을 잃지 않은 유일한 여신이었소. 그래서 '처녀의 방', 즉 파르테논이란 말이 붙여졌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역시 신화죠. 인간의 실제적 삶의 기록인 역사는 아닙니다.”
“시모이강…….”
트럭 운전사와 마라차가 놀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리스인인 자신들이 까마득히 모르는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들과 좀 떨어져 굵은 보리수 그늘에 묻힌 휠체어 위에 앉아 있던 마라차가 갑자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한국전에서 몸이 저 꼴이 되어 돌아오자 고향에 살던 아내가 달아났답니다. 30년도 더 전 얘긴데 그는 아직도…….”
트럭 운전사가 불어로 나직이 설명했다. 그들은 마라차에게로 다가갔다. 주하도 목발 소리를 죽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라차의 아내는 나이가 17년이나 어린 그의 사촌동생이었습니다…….”
트럭 운전사가 덧붙였다. 그들은 침울해졌다. 갑자기 암탉의 홰치는 소리처럼 목발을 푸다닥거리면서 주하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 이름이 앙드로마크라고 하셨지요. 형님께서? 트로이 왕자의 아내가?”
“아마 그랬던 것 같소.”
“그 여자하고 저기 저 파르테논의, 그렇지, '여자의 빈방'에 살았다는 아테나라는 여신과 무슨 관련이 없었을까요? 내 생각이 아마…….”
“전설과 신화 속의 여주인공들이 무슨 인연이 있었겠소? 부질없는 얘기지…….”
“형님! 저기 마라차 씨를 좀 보십시오, 눈이 있으면. 관련이 없는 얘기를 하는데 그가 왜 웁니까. 왜?”
“마라차의 아내는 빈방을 지키다 못해 달아났지 않소. 그러니 저기 파르테논신전을 가냘프고 우아한 건축양식인 이오니아식으로만 짓지 않고 굳건한 남성미의 상징인 도리스식과 병용한 것은 영원의 처녀신인 아테나를 위로하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합디다.”
“하 참!”
주하는 놀랐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좀 흥분하는 듯했다.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걱정스럽다는 듯 주하를 부축했다. 이굉석 씨도 주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트럭 운전사가 나섰다. 테살로니키 행 출발을 조금 늦추고 일단 시가지로 들어가자고 했다. 이것저것 다 보려면 끝이 없으니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신전이나 대강 보고 떠나자고 했다. 반대 의견은 없었다. 종식은 시내에 들어가면 그냥 그대로 그들과 헤어지고도 싶었다. 트럭 운전사는 마라차를 휠체어째 버스 위로 들어 올렸다. 운전사는 마라차에게 무슨 소리를 마구 해 댔다. 자식아, 울지 않겠다고 해 놓고서 짜기는, 하고 나무라는 듯했다. 계속 짜면 안 데려갈 테다 하는 듯했다. 마라차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저어 댔다.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버스는 프닉스 언덕을 천천히 굴러 내려갔다. 산모롱이를 돌자 이때까지는 시야에 없었던 피레우스항구가 드러났다. 아테네의 관문이다. 바닷물이 새하얗게 떠올라 보였다. 거대한 선박들이 엄청나게도 많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 나라가 해운국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터키의 침략 위험에 시달려 왔으나 오늘날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저 거창한 선박대의 힘이었다. 세계사 속에 비잔틴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동로마제국이 망하고 나서 금세기 초까지 그리스는 4백여 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에게해에 떠 있던 그리스인들의 선박들은 전멸되고, 이들은 세계를 유랑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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