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박의 기행수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람세스 2세(中)
<김종박의 기행수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람세스 2세(中)
  • 성광일보
  • 승인 2020.10.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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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박 /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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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는 붙잡힌 히타이트족 간첩 2명에게서 히타이트의 주력부대가 북쪽으로 좀 떨어진 알레포에 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카데시에 있는 주둔군만 처치하면 잘 거라고 승리를 확신 했다.
그러나 군대가 카데시의 야영장에 도착해서야 람세스 2세는 비로소 히타이트의 주력부대가 도시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람세스는 바로 사람을 보내 나머지 부대를 서둘러 오게 했으나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히타이트군이 물밀듯이 공격해왔다. 

이집트군이 2명씩 전차에 탄 데 비해 그들은 3명씩 탄 2,500대의 전차부대로 공격해왔던 것이다. 기습을 당한 이집트 선두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도망갔고 람세스 2세와 그가 직접 이끄는 소규모 전차부대는 적군에 완전히 포위당한 채 필사적으로 싸웠다. 다행히도 전투 막바지에 시미라 기동부대가 나타나서 주력부대와 기적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그나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전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전술상으로는 이집트가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카데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집트의 패배였다. 다음 날 양쪽 군은 모두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 휴전을 맺었고 이집트군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는 파라오 시대부터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전투 가운데 하나로서, 커다란 역경을 이겨냈다는 람세스 2세 왕의 자부심 덕분에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와 누비아의 신전들 벽에 공식 기록과 장시(長詩)의 형태로 이 전쟁에 관해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돋보이게 멋드러진 그림들을 그려 넣었는데 그 장시는 파피루스에도 남아있다.

카데시 함락 실패는 대외적인 이집트의 지위에 타격을 주어, 남 시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의 몇몇 속국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에 다시 도전하기 전에 이집트의 아시아 영토 북쪽 변경지역을 강화해야 했다. 재위 8년이나 9년째에 갈릴리와 아모르의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그다음 해에는 다시 알칼브 강으로 갔다. 히타이트의 수비를 뚫고 카트나와 투니프을 정복한 것은 재위 10년째 되던 해로 보인다. 당시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기습을 받아 아무런 장비도 없이 전투에 나가야 했으나 결국 승리를 거두고 그곳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대군주로서 투니프에 자기의 조상(彫像)을 세웠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알렉산드레타와 카르체미시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코데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람세스 2세는 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계속 히타이트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오래 차지하고 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며, 결국 16년 동안 히타이트족과 간간이 충돌하다가 BC 1258년에 동등한 자격으로 히타이트의 왕 하루실리 3세와 상호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양(兩) 강대국은 우호관계를 맺고 정규적으로 외교 사신을 교환했다.
BC 1245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의 맏딸과 결혼했고 나중에는 둘째 공주와도 결혼했다. 히타이트족과의 싸움 이외에도 에돔, 모아브, 네게브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계속했으며 나일강 삼각주를 계속 침입하여 거기에 정착하려던 리비아인들과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리비아인들과의 전쟁에는 람세스 2세가 직접 나섰지만 작은 전투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고 그의 치세 후반기에는 대체로 전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재위기간에 지어진 신전의 수가 당시의 번영을 재는 하나의 척도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람세스 2세의 재위는 그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광영의 시기이다. 

19세기 이집트 학자들이 그를 '대왕'(大王)이라고 부른 것은 신전에 오롯이 묘사되어 있는 대로 전쟁에서 보인 용맹성과 함께 재위 동안의 번영 때문이며, 그의 백성들이나 후손들도 그를 대왕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람세스 2세는 특히 훌륭한 군주였다. 제20왕조의 왕은 9명이나 그의 이름을 땄고 그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이었으며 백성들은 그를 '세세'(Ses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집트에서 람세스 2세는 테베에 카르나크의 다주식(多柱式) 대집회장을 완성했고 세티 1세가 짓던 아비도스의 신전 건립을 계속해서 완성했다. 이것은 둘 다 세티 1세의 죽음으로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었다. 나일 강 서쪽의 룩소르(테베)에 아버지를 기리는 신전을 완공하고, 오늘날 라메세움(Ramesseum)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전을 만들었다. 

또한 아비도스의 아버지 신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신전도 지었으며 수도에는 큰 신전 4개와 작은 신전 여러 개를 세웠다. 수단의 나일 강 유역인 누비아에는 최소한 6개의 신전을 지었는데 그중 왕의 조상이 4개 새겨져 있는 아부 심벨 절벽의 신전 2개가 가장 뛰어난 장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2개의 신전 가운데 큰 것은 세티 1세 때 시작되었으나 주로 람세스 2세 때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완전히 람세스 2세에 의해 지어졌다.

이집트로 들어가는 동쪽 어귀의 하나인 와디투밀라트에 페르아툼이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성서는 이 도시를 비돔이라고 부르면서 곡식을 저장하는 도시(출애 1:11)로 적었으나 아마도 요새화한 변경도시이며 세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중요 유적 가운데 람세스 2세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유적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가 자신의 작품에는 물론이고 다른 왕들의 기념비에도 서슴지 않고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피람세스와 페르아툼을 세운 것 외에도 누비아 금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동부 사막에 우물을 판 일은 그의 두드러진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람세스 2세는 전대 파라오에 비해 이와 같이 굉장히 많은 동상과 신전, 기념물 등을 세웠는데 어떤 학자들은 그 이유를 당시 이집트인들이 멸시하는 아시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고 귀족이 아닌 군인의 자식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람세스 2세가 파라오가 되자 자격지심으로 자신의 태생을 고귀하게 포장하고 스스로 신격화를 하려고 건물을 많이 세웠다고도 한다.

그는 이러한 건축사업을 거창하게 벌였을 만큼 나라를 풍요롭게 이끌었으며 이집트의 태양왕으로 불리며 칭송받아온 것은 세월을 초월해서 엄연한 사실이 되고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람세스 2세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에겐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단연 네페르타리(Nefertari)이다. '네페르타리'라는 이름 자체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서 그녀는 13살 때 당시 15세였던 람세스 2세와 결혼해 왕세자와 딸 한 명을 낳고 재위 24년경 사망하는데, 죽기 전까지도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제1왕비였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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