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뚝섬만세운동 기념비 세운다
1919년 뚝섬만세운동 기념비 세운다
  • 원동업
  • 승인 2021.02.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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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의 독립선언서? 성동의 유관순! 그들이 우리에게 옵니다
- “옳은 피는 힘이, 선한 죽음은 가치가…” 그날 기억 돌에 새긴다
  
  1919년 뚝섬삼일운동 기념비가 건립된다.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면사무소(현 성수동성당)를 바라보는 왼편 빈 터 자리다. 뚝섬삼일운동을 최초 발굴한 최창준 대표(좌로부터 세 번째)와 표지석을 세우는 성동구청 자치행정과 직원들과 주민들의 부지 선정 모습.

 

매해 봄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삼일운동을 함께 기억합니다. 그 중엔 기미년 독립선언서도 있고, 당연히 유관순 누나 혹은 언니도 있죠.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 대한민국이 기억하는 과거입니다. 성동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선언문이 펼쳐졌을까? 독립만세를 힘껏 외친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런 궁금증들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동역사문화연구회 사람들-최창준과 박영천 등-입니다. 이들은 2016년 마을공동체 사업의 일환으로 이 조사를 합니다. 2013년쯤 발간했던 책 <뚝섬나루에서 한양도성까지>에서 실마리를 잡았던 뚝섬 만세운동에 대한 심층적인 탐색이었습니다. 

그 책은 2016년 <뚝섬길 가득 채운 3월 함성 뚝섬삼일운동>로 발간됩니다. 120여 쪽 자료집에는 뚝섬에서 있었던 1919년 기미년의 독립만세 운동이 세심하게 발굴되어 있습니다. 

그 만세운동을 기려, 오는 2021년 3월 1일 오후 2시. 뚝섬만세운동 기념비 제막식이 '현장'에서 열립니다. 1019 기미년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102년 만에, 2016년 발굴된 지 6년여 만의 일입니다. 표지석에 새겨질 문구는 이렇습니다.

◆1919年 3月, 뚝도리의 민중들이 이곳에서 자주독립의 함성을 울리다. 

님들이 있어 우리의 민주주의, 독립국가는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님들의 용기와 희생,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뚝섬326 만세운동을 만들기까지, 선언서들

우리들이 여러 차례 학교에서 배운, -기성 세대는 외우기도 한- 1919년 기미년 삼일운동의  선언서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오등에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그런데 이보다 일찍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재일본도쿄조선 YMCA 강당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가 2월 8일 개최됩니다. 수백 명의 유학생들이 운집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의결하고,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각국 대사관, 일본 귀족원과 정의원 및 정부, 내외언론기관에 우송하죠. 학생들의 이 '선도적' 활동 2.8 독립선언은 삼일운동에도 큰 자극이 됩니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아 이천만조선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그런데 보면, 이들의 독립은 조선(朝鮮)의 독립입니다. (대한독립이 아니고?) 대한민국은 아직 서지 못했고, 대한제국이 1897년 고종에 의해 외롭게 선포된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대한독립선언서도 있습니다.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길림)에서 만주 연해주 미국 등서 활동중이던 독립운동가 39명은 1919년 음력 1월 1일을 기해 대한독립선언서로서 독립을 천명합니다. 그 직후 조소앙이 일본 도쿄로 건너가 백관수, 이광수에게 연결해 2.8독립선언에, 국내로 들어간 곽경, 선유혁 등이 이승훈 등에게로 이어져 3.1운동의 불길을 당긴 거죠. 이 '대한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 4월 11일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이렇게 새겨놓고 있습니다.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100여년 전 1919(기미년)년 3월 1일, 그 날은 고종의 장례식날이었습니다. '독살'된 '나랏님'의 상을 치루는 날이니 분개한 수많은 백성들이 운집할 터, 이날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을 하자고 결의를 모은 것입니다. 선언서에서 보듯 처음 만세운동은 독립운동가들, 학생들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앞장선 것입니다. 하지만 피가 온몸 구석구석 발가락과 손가락까지 돌아야 진짜 삶인 것처럼, 만세운동 역시 전국에 퍼져야 진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이제는 절대로 과거로, 왕정으로, 봉건으로, 고분고분한 굴종의 길로는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뚝섬만세운동도 그런 뜻이 있었습니다. 

뚝섬에선 어떤 선언문이 나타났을까요? 다음 기록들은 일제 경찰들이 시찰을 통해 습득하고, 상부에 보고해 나타나있는 자료들입니다. 만세를 독려하는 '주의서' 혹은 '경고' 그리고 동시에 '선언문'입니다.  

◎서독도리 발견 주의서

뚝도 청년동포형제들아 전일 선언서도 보았거니와 근일 삼천리강산 13도 중 2천만 동포가 전혀(모두) 소동을 하는데 하여한(왜 그런지) 뚝도 청년들은 무일언반시?(한마디 하지 않으니) 뚝섬은 독립을 반대와 같으니 (중략) 2월 25일(양력 3월26일 편집자주)은 뚝도 우편안골 우물 앞으로 공모되어서(모여서) 만세를 부르시되 시간은 하오 7시30분쯤 되어 부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뚝도 천여 호 매촌을 불로 (후략) - 조선건국 4252년

◎하왕십리 발견 경고문

나의 동포 제군이여, 나아갈지어다. 지금은 길에 가시가 막혔으나 (중략) 옳은 피는 힘이 있고 선한(?) 죽음은 가치가 있으니 어찌 구차한 고생과 죽음을 아낄 것이냐? 우리 동족 만여 명은 옥중에서 신음을 하고 우리의 골육 수 천 명은 무도한 칼 아래에 부르짖었고(이하 생략)

◆그날 뚝섬에 수백 명의 유관순이 있었다

독립기념관이 기록하고 있는 중부지역-경기 지역의 3.1운동 양상 중 고양에 대한 부분, 그중 3월 26일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26일 밤 9시경 뚝섬에서는 군내 최대 항일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주민 2,000여 명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를 구타한 후 면장집으로 몰려가 투석하였으며 대다수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 300명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헌병대측과 교섭으로 해산하려던 중 증파된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로 발포함으로써 사망 1명과 부상 1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시위 주민 중 103명을 체포하였다. 시위 주동자로 체포·기소된 12명 중 단순노동자를 비롯하여 마차꾼·소달구지꾼·짐차꾼 등 노동자 10명으로 다수를 차지하였다.”

위의 '군'은 고양군입니다. 당시 성동은 고양군, 왕십리쪽은 한지면, 뚝섬쪽은 둑도면이었습니다. 일제 헌병과 경찰들이 잡아간 이들의 재판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시위대들이 모인 것은 '이문동'이었습니다. 현재 성수동 한강으로 통하는 2수문 앞쪽, 즉 뚝도시장쪽 갑문 근처입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동네 입구를 마을 문, 즉 이문(里門)으로 불렀답니다. 그곳서 야소교회, 즉 지금의 성수동교회를 거쳐 서뚝도리식당을 거쳐 행진해 면사무소로 이르렀다는 거죠. 

성수동 성덕정길은 현재 '구길'로 불립니다. 1920년대 당시엔 가장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면사무소에 헌병주재소에, 금융조합과 우체국, 보통학교와 권업모범장(둑도원예지장)이 빼곡하던 곳이었다고 지도는 그리고 있습니다. 2021년의 우리가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그곳에서 당시도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시 역사의 도약을 이루려는 이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성동의 유관순'은 누구였을까요? 거기 모인 1천 5백여 명, 그들이 모두 하나하나의 유관순이었을 것이지만, 몇 사람의 이름은 특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김완수와 신원룡 최자근동 그리고 염명석과 이순명(혹은 류순명) 등입니다. 김완수는 좌안맹, 즉 왼쪽 눈이 상한 이였습니다. 당시 31세 서독도리 살던 마차꾼입니다. 체포후 1심에서 그는 징역2년에 처해집니다. 신원룡 최자근동은 각 1년입니다. 이들의 죄는 '만세를 수차례 부르고, 행진하였다는 것'에 더하여 신과 최는 앞장을 선 때문에, 김완수는 헌병이 총을 쏘며 해산시킬 때 “피하지 말라! 공포탄이다."로 대중을 선동한 '사건의 괴수'였기 때문입니다. 

염명석은 짐차꾼으로 당시 36세입니다. 배와 팔에 총상을 당하여 연세 세브란스 병원서 치료를 받다가 일제 헌병들에게 발각돼 끌려갑니다. 당시 병원책임자 O.R.애비슨이 기록해 본국에 보고한 문건에 남아있습니다. 이 문건에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류순명, 양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뚝섬의 어르신들 중엔 “뚝섬의 용정꾼(벼 찧는 방아를 들고 다니던 이) 이순명이 만세운동때 총상을 입어 이후 다리를 절며 살았다”고 기억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 순명이 이 순명은 아닌지, “힘에 부쳐 확인하지 못했으나 과제로 남은 사람”이라고 성동역사문화연구회 최창준 대표는 강조했습니다.

김완수의 수감사진.-국사편찬위원회
성동의 독립운가들. - 자료를 모아 성동역사문화연구회 편집

씨앗을 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자를 자루에 담아놓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심는 것입니다. 박제는 증거로 남지만, 대상을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100여년 전 만세운동을 돌에 새겨 세웁니다. 그 기록의 기억이 나의 마음에 심어지고, 우리의 삶에서 싹터 자라가기를 고대합니다.

 <원동업 성수동 쓰다 편집장=3bigpictu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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