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국가 조선에서 오래전에 죽은 도선이 왜 필요했을까?
혁명 국가 조선에서 오래전에 죽은 도선이 왜 필요했을까?
  • 서성원 기자
  • 승인 2021.09.15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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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31)도선(道詵)
왕십리도선동 도선마을공원에 있는 지명 유래비. ⓒ서성원

○ 소재지: 서울 성동구 도선동 

◆ 대통령 선거와 민심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내기 위해 경선을 한다. 경선 후보들이 경선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다음, 정당별로 대통령 후보가 정해지면 그땐 다시 다른 당 대통령 후보들과 경합을 벌인다.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면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어떻게? 이게 쉽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 마음을 얻어야 한다. 사람 마음 얻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신뢰할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능력자로 받아들일까. 
후보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중에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방법도 쓴다.  바람직하지 못한 짓을 했었다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게임이다. 그렇게 말한 후보자도 구렁텅이에 함께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후보자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 중에 이런 게 있다. 사람들이 신뢰하는 인물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왕십리도선동 공공복합 청사. ⓒ서성원
왕십리도선동 공공복합 청사. ⓒ서성원

왕십리·도선동·홍익동 지명 유래비 

2021년 9월 5일, 왕십리도선동을 찾은 것은 지명 유래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명 유래비는 도선마을 공원 안에 있다. 2020년에 도선동 동민회에서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래비에 적힌 내용을 옮겨본다.

왕십리(往十里)와 도선동(道詵洞) 지명 유래는 다음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이곳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서북쪽으로 십리(十里)를 더 가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신라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대사(道詵大師) 현령(顯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왕십리는 왕심리(往審里, 往尋里), 왕심촌 등으로 불리었음을 옛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십리라는 지명은 원래 지명에 도성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설화 등이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도선동은 1959년 10월 왕십리 일부를 관할하는 행정 동명으로 정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1964년 9월 홍익동과 함께 법정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동 지명 유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설화에 도선대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修道)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도선동과 함께 왕십리에서 분동된 홍익동(弘益洞)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비롯되었다. 
2020년 음 10월 1일 도선동 동민회

◆ 새 술은 새 부대에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다. 정치 권력은 고려말부터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개국하고 나서는 웬만큼 휘어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권력이 남아있었다. 개경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력, 문화적 토대 등등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도읍을 옮겨야 했다. 
새로운 도읍을 정하는 데 무학이 역할을 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그가 승려라는 점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나라다. 무학은 승려 신분을 내려놓고 새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했을까. 이성계가 불교 쪽을 달래는 한 방편으로 무학을 파트너로 삼았을까. 전하는 얘기로는 오래전부터 무학은 이성계의 정신적인 스승이었다고는 한다. 

◆ 조선은 혁명 국가, 이성계는 민심을 얻어야 했다

지명 유래비 내용에 도선(道詵)이 등장한다. 
무학 얘기에 왜 도선이 끼어들었을까. 도선은 827년 영암에서 태어나 898년에 죽었다. 조선 한양 천도는 1394년(태조 3년)에 했다.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려는 데 반대하는 세력이 오죽 많았겠는가. 개경을 기반으로 했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 이들은 반대하는 까닭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데, 영향력 있는 인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이성계는 도읍을 옮기는데 도선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집터를 고른다거나 묘지를 만들 때, 사람들은 도선이 알려준 방법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집터를 골라서 집을 지으려 할 때 도선의 방법을 이용했을 것이다. 묘터를 고르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었지만 사람들이 땅을 보는 방법은 여전히 그에게 의존했다. 그래서 무학의 꿈에 나타나서 도선이 한양이 도읍의 적지라고 말하더라고 얘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도선이 골라주는 땅이니까 도읍지로 적합한 곳이라고 믿었을까. 아마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도선이다. 그 일로 해서 도선은 조선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동구에 도선동이 생겨났다.

<도선에 대하여>
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남.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음.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 받음.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고행, 산하에 대해서 보고 배워서 지리에 대한 안목 넓힘.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 한국 자생풍수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 세움. 나쁜 땅도 고쳐서 쓸 수 있다는 것. 경문왕 4년(서기 864년) 37세부터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제자들을 가르침.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 저서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요약)

현재 지역에 남아있는 '도선'이란 어휘. ⓒ서성원
현재 지역에 남아있는 '도선'이란 어휘. ⓒ서성원
현재 지역에 남아있는 '도선'이란 어휘. ⓒ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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