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산 여행
[수필] 부산 여행
  • 이원주 기자
  • 승인 2021.11.04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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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경 아 / 작가
<배경아 프로필>
-경북 예천군 출생
- 안동대학 가정학과 졸업
-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 광진문인협회 회원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해질 때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으면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부산에 가서 여동생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 시간을 내서 부산에 가보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갈 것인가? 내가 서둘지 않으면 동생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여동생이 결혼한 이후 본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아웅다웅하며 커서인지 몇 년을 만나지 않고 살면서도 잘살고 있겠지 생각하는 것에 그쳤다. 아이를 키우느라고 멀다는 핑계로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기차를 타기 위해 수서역으로 갔다. 기차의 앞모습이 거대하게 다가왔다. 철로 위에 엎드린 커다란 몸체 뒤로 긴꼬리가 달려 있었다. 순간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가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기차는 달리다 비행기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평일인데도 기차는 만석이었다. 멀리 부산까지 가는 사람들이 이리 많다니 놀라웠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내 자리에 앉으니 안도감이 들었다.

어젯밤, 기차표의 날짜와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잠깐 방심하면 황당한 사고를 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번거롭지만 몇 번의 확인은 필수다.
문득 이십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막내가 다섯 살이었으니 나도 젊었었다. 두딸을 데리고 힘든 줄도 모르고 부산 여행을 감행했다. 사촌끼리 만난 아이들은 즐겁게 뛰놀았다. 햇살이 숨어드는 저녁에는 광안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파도와 달리기도 하고 싱싱한 회도 먹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부산역에서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우리 좌석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하며 황망하게 일어서다가 차표를 자세히 봤다.
아뿔싸! 이럴 수가, 기가 막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기차표는 오늘이 아니라 다음 날 것이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고 승차권을 받았던 내 잘못이 크다.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좌석을 내어주고 망연히 서 있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큰애는 그렇더라도 작은애는 다섯 살인데 다섯 시간을 어떻게 서서 간단 말인가?

이미 기차는 출발하여 내리지도 못했다. 그때 기차 내를 순찰하던 차장이 우리의 사정을 보고 있었던지 직원용 자리에 앉아서 가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기차에 직원용 좌석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못 본 척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삼 모녀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것이다. 너무도 큰 배려에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분의 명찰을 보지 못했다. 이름도 모르는 친절했던 그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부산에 가지 않았다. 바쁘기도 했지만, 그때 기억으로 인해 부산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러다 이십여 년 만에 부산에 가는 것이니 감회가 새로웠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여서 그런지 서울을 방불케 했다. 이십여 년 전에는 지하철 공사를 하느라 버스가 지나칠 때면 도로에 깔려 있던 철판이 덜컹거리며 소리가 요란했었다. 지금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지하철은 몇 개 노선으로 늘어나 있었다.

동생은 죽집에서 일한다. 주방에서 죽을 끓이다가 매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동생이 쇠고기 야채죽을 만들어 주었다. 평소 죽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죽 한 그릇 가격이 싼 편이 아니었는데도 손님이 많아서 장사가 잘된다니 놀라웠다. 동생 일하는 곳이 어떤지 보았고 맛있는 죽을 배불리 먹었다.

동생 집 베란다에 서니 광안대교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강이 있는 서울의 밤도 좋지만 바다가 보이는 부산의 야경은 멋있었다. 집 안에서 밤바다를 볼 수 있는 동생이 부럽기도 했다.
늦은 저녁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곁들여서 먹고 난 뒤 광안리 해수욕장을 따라 걸었다. 거리공연을 젊은이들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같이 노래하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달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의 어둠을 깨운다. 동생과 나는 맨발로 해수욕장의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을 간지럽힌다. 동생과 함께라서 너무 좋았다.

부산의 밤은 바다, 모래, 젊은이들과 불빛으로 흥겨웠다. 높은 빌딩의 화려한 네온사인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현란하게 춤을 춘다.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부산의 밤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흥겨움과 역동적인 젊음을 둘러보며 걷는데 우리 둘의 발걸음 소리가 공허했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아니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흘려보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짧게 스친다. 중년이 되어서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표현하기 힘든 슬픈 감회에 빠졌다. 어릴 적 기억들은 부산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떨어져 살아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닳아 없어지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이슬이 맺힌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던 동생도 물에 씻겨온 둥근 조약돌처럼 온화하게 변해있었다. 형제간에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필요치 않음을 우리는 안다. 몇 년 만에 만남에 반가우면서도 짧은 순간 서로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살폈다.

나는 가까이 살면서 음식도 나눠 먹고 일상의 고민을 함께하는 다른 형제들이 많이 부러웠다.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속상해서 왜 그리 멀리 시집을 갔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쓸쓸하게 웃는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의 큰 그림 때문일 것인데 나도 부질없음에 말끝을 맺지 못했다.

동생은 30년을 가정주부로만 있다가 오십이 넘어서 사회로 나왔다. 일찍 시집가서 살림만 하다가 늦은 나이에 직장을 구하려니 대학 졸업이란 학력은 아무 쓸모가 없었단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용기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온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다 보면 손가락도, 어깨도 아파서 죽을 지경이란다. 죽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다고 한다. 아픈 것을 참고 계속 일하면 관절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일을 빨리 그만두라고 했다. 동생은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 동생의 말을 반만 믿으련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이는 모든 것을 내 눈 속에 넣고 싶었다. 빠듯한 일상에 부산에서 서울 간의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창밖으로 나무들이 빼곡한 산과 반듯한 논들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지나간다. 싱그런 녹색의 벼들이 가득 담긴 논들은 잘 가꾼 도시 정원 못지않게 아름답게 보였다.

시골 마을을 지나면 아파트와 높은 건물의 도시가 다가오고, 산속을 관통하는 깊은 터널이 나타난다. 열차는 쉼 없이 서울을 향해 달려간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서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두 딸을 데리고 부산에 갔을 때와 이번에 혼자 부산에 갔던 일을 되돌아 보았다. 몇 년 만에 동생과 서로의 속내를 이야기하며 보듬어주었던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짧았지만 의미가 있는 부산 여행이었다. 몇 년 뒤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해보면서 부산 쪽을 응시했다. 이번 부산 여행은 동생과 나의 인생의 한 페이지를 풍성하게 해줄 것 같았다.
달리는 기차는 내게서 동생을 점점 더 멀리 떼어 놓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에 점점 더 선명해지는 별 들은 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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