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다리 이야기(1)
[수필] 다리 이야기(1)
  • 성광일보
  • 승인 2022.03.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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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박
김종박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부회장

다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의 작은 냇가에 듬성듬성 놓인 돌무더기 다리다. 어른들도 뛰어넘기엔 어려운 너비 정도의 시내를 건너는 길에는 대개는 볏짚으로 엮어 큰 꾸러미를 만들어 작은 조약돌들을 담아 만든 다리들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그 다리를 걷게 되는 덕분에 어린 우리는 십 리도 더 떨어진 초등학교를 잘 다녔다. 한데, 그러한 다리는 돌덩이나 콘크리트와 같은 내구성 다리가 아니어서 몇 달 못 가서 볏짚 꾸러미가 헤지고 터져 조약돌들이 새어 나와 무너지면 어느새 새 볏짚 다리가 놓이곤 했었던, 다리 하면 맨 먼저 떠오르곤 하는 추억의 다리이다. 

시내의 폭이 넓으면 큰 돌의 다리가 때로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도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넘어 10? 이상의 강이랄 수 있는 학교가 있는 면 소재지 쪽엔 30cm에서 1m 정도의 크고 넓은 육중한 돌의 긴 다리가 있었다. 작은 다리가 아니라 큰 다리였다.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3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군에서 개최된 글짓기도 포함된 학력 경시대회 대표로 선발돼 4, 5, 6학년 대표 선배들과 함께 인솔 교사들의 지도하에 촌놈이 순창군 도회지로 나가게 됐다. 난생처음,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의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다 보니 그만 차멀미를 했던 거 같다, 고통스러워 밖을 보니 멋있고 기다란 시멘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낡고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은 것이었으나, 아! 저렇게 크고 긴 다리도 있단 말인가…. 어린 마음에 한참이나 감탄했었다. 

그러다가, 졸업기를 맞은 초등 6학년 때 촌놈들로서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대처(大處)인 선망의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180명 세 클래스에서 그래도 좀 여유가 있는 집의 자녀들인 80여 명 정도만 갔었던 거 같다. 그 당시는 먼저 졸업한 선배들이 서울로 올라가서인지 서울 물을 먹고 설 명절에 고향에 내려와 좀 생소하지만 멋지게 느껴지는 서울말을 써대면서 옷맵시까지도 세련되게 뽐내는 선배들을 보면 하늘만 보고 자란 벽촌의 촌뜨기 우리에게는 나도 서울 한 번 가보는 게 평생소원이라던 시절이었으니, 서울 수학여행 참여 자체만으로도 모두 날아갈 듯 뿌듯하고 자부심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드디어 난생처음 학교에서 40여 리 떨어진 오수역(獒樹驛)에서 기차를 탔다. 칙칙폭폭 빠르기도 하지만 철길을 달리는 그 긴 까만 열차에 콩나물시루 같은 처음 보는 수많은 승객 때문에 어린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우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 구경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들떠 있어서 피곤한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깜짝 놀란 것이 있었으니…,  

돌도 나무도 아닌 철(鐵)로 된 다리를 무거운 기차가 막 지나가는 게 아닌가 말이다. 말로만 듣던 철제 다리, 철교를 촌놈이 처음 목격한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한데, 선 채로 그냥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이 되어 서울역에 다 와 간다는데 내 눈앞에 엄청난 철교가 위압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 둥그렇게 기다란 멋진 다리를 통과해서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검푸른 한강이 저만큼 밑에서 보여 왔다. 세상에 이렇게 긴 철교도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처음 겪는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네댓 개 정도의 떨어진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긴 거리로 느껴졌고 정말 오랫동안 지나갔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온몸에 닭살처럼 전율이 솟구쳐왔다.

누군가 '삶이란 첫 경험의 연속 조합'이라 했다던가?
나는 다리, 한강 다리를 통해서 지금도 짐짓 그 말의 참뜻을 음미해보곤 할 때가 많다. 왜인가? 살면서 첫 경험들은 내내 그 강한 여운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인지 잊혔다가도 세월이 흘러도 새록새록 연관된 아름다운 추억을 일으켜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릴 제 고향에서 보았던 조약돌 무더기 다리, 지금은 새마을 운동 등으로 시내 폭을 넓혀 시멘트 다리로 교체돼 사라졌지만, 자신이 태어나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안전 특히 자라나는 어린 자식들의 건강한 안전을 끝없이 바라는 것이 부모인 자신들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신들을 나아서 지켜주신 선조들의 전통적인 내리 바람이라는 것을 이어받은즉슨,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자 후손들의 터전인 공동체를 홍익하는 조상숭배의 얼도 함께 포함되어 나타난 우리 부모님 세대의 사랑의 얼이라는 걸 후에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됐다. 나아가, 그래서 그분들은 선조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이웃 공동체를 배려하는 이바지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홍익(弘益)의 진솔한 마음에서 특히 정월 대보름 등을 맞이하여 돌무더기 다리를 남몰래 밤에 놓아 왔다는 깊은 뜻까지 담겨 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으니…. 
 조상들의 조약돌 무더기 다리에서 시작된 '다리' 그것은 '이어짐' 즉 연결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살다 보면 사람들은 고래(古來)로 한 군데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한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마을 공동체가 생겨나게 마련이고 더불어 삶의 터전도 커지게 돼 뫼들내(山野川)가 더욱 포함되게 된다. 커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뫼들내가 특히, 뫼내가 장애물로 다가오기에 십상이다. 커지는 공동체를 지켜가기 위해선 그러한 장애물을 극복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거기에 갇히고 말기에. 사람들은 처음엔 손쉽게도 산을 넘기도 하고 물을 건너기도 하면서 들에는 길을 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산들엔 더 넓고 길게 길을 만들고, 물에는 강에는 길 즉, 다리를 놓는 지혜를 발견하고 실천해왔던 거. 이러한 길은 모두 장애물을 극복하고자 해서 창안(創案)된 것이리라.

뫼들내의 길 만들기에는 뫼들과 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뫼들은 처음부터 이어진 길을 연장하는 '연장의 길'이지만 내는 분리된 지역을 새로이 서로 이어주는 길로서 '연결의 길'이라는 것이다. 연결은 당연히 서로 떨어진 곳을 이어준다. 그럼으로써, 강을 두고 벌어진 생활 풍습과 전통적인 사고와 말씨 등, 자기 지역에서만 통용됨으로써 제한적이고 폐쇄될 소지로 인해 완전히 이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다리로 인해 연결시켜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서로의 소통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서로 간의 어쩔 수 없는 다름도 받아들이는 아량의 폭도 넓혀서 보이지 않는 그간의 단절의 벽을 뛰어넘어 보다 윤택하고 다채로운 상호 공존의 삶을 모색하고 만들어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역 상호 간 삶의 질을 높이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도 세월이 흐르면서 현대로 올수록 그러한 현상들은 승수효과를 낳아서 양안지역(兩岸地域)이 상호 엄청난 발전상을 보여주는 곳들이 국내외적으로 비일비재해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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