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기억
선택적 기억
  • 성광일보
  • 승인 2022.03.21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란교/논설위원
송란교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이전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고르고 고르며 반추(反芻)해 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맛있는 것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서 그 재료가 맛이 있고 없고를 판단한다. 이런 판단의 근저(根底)에는 경험의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맛있는 음식을 고르고 맛있는 친구와 사귀고 맛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그 사람은 무언가 자신만의 노력을 곁들인 것이다.

거꾸로 아무거나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맛있는 것을 골라야 하는 스트레스는 덜할 것이다. 맛있게 먹으면 되는 것이기에 먹을 음식이 있기만 하면 고마운 일이다. 맛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먹으면서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먹다 보니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맛있는 음식이나 맛있다고 이름난 음식을 애써 고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것도 큰 복주머니를 달고 태어난 것이다.

최근 직원들과 식사를 할 때였다. 메뉴는 다양했는데 그날따라 모두 열무 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주문한 비빔밥이 나오자 다른 직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비비고 있었다. 그런데 한 직원이 외쳤다. ‘제 열무 비빔밥에는 왜 열무가 없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옆 사람의 비빔밥에도 열무가 없는지 확인절차를 거쳤다. 빨간 고추장에 버무려진 엇비슷한 색깔의 여러 가지 재료가 한 데 뒤섞여 있음에도 어떻게 열무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냈을까?

맛있게 먹고 싶은 열무 비빔밥에 열무가 빠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열무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예전부터 엄마가 담아 주셨던 향수 어린 열무를 무척 즐겨 했기에 자신이 먹고 싶은 열무를 열심히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열무가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당황을 했을까? 그런 추억이 없고 그저 식사 한 끼 때우기 위해 주문한 사람들은 그 비빔밥에 열무가 빠졌는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열무 비빔밥에 열무가 빠졌다면 이 비빔밥은 열무 비빔밥일까? ‘체리피커(cherry picker)’는 예쁜 케이크 속에 체리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슬퍼질 것이다.

어두운 밤이어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얼굴 빨개지는 일을 아무렇게나 저질러 놓고 짐짓 태연하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밤에 네가 한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라는 환청이 계속해서 들려오면 이를 어쩌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테(lethe)의 강물,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 고통스러운 기억뿐만 아니라 즐거운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 강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과거의 모든 호불호(好不好)의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싶을까? 아름다운 추억은 값비싼 자산인데도 말이다.

갑자기 서산대사의 시가 떠오른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뒤따른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라)’. 홀로 있을 때도 항상 근신(謹愼)해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핸드폰을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저장해야 할 데이터의 양이 넘쳐서 다른 귀한 자료를 저장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저장되었던 데이터를 지워야 한다. 우리들의 뇌 속의 기억도 그럴 거라 믿는다. 좋은 추억을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면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을 더 크게 늘리거나, 좋지 않은 기억들을 자주 지워야 할 것이다.

너는 ‘틀렸다’고 말하면 관계의 끈은 싹둑 끊어진다. 내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상대방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심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말로써 상처를 받았던 그 아픈 기억이 두엄 속의 비닐처럼 오랫동안 썩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경험으로 알 것이다. 똑같은 이치로 상대방의 마음속에서도 그 쓰라린 기억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레테의 강물을 마신다고 해도,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관계의 리셋 버튼, 삭제 버튼을 누르면 모두 지워질까? 요즘에는 포렌식이라는 이상한 괴물을 동원해 과거의 모든 기억을 복구해내고 있으니 어디 숨을 데도 숨길 데도 없다. 기억의 유통기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짧아진다고 하지만 상처받은 기억의 유효기간은 끝이 없다. 아름다운 추억거리만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