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과 풍수 188. 동양오술(용대기 최종회)
동양학과 풍수 188. 동양오술(용대기 최종회)
  • 성광일보
  • 승인 2022.08.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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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老泉) 김흥국
광진투데이편집위원장. 삼오지리학회장역임. 現. 한국현공풍수학회장. 신화씨엠씨(주)대표.
노천(老泉) 김흥국

본 연재는 2년여에 걸친 ‘용대기’의 마지막 시간으로 용문양과 용대기 그리고 둑기에 대한 치우천황의 유물을 역사를 거슬러 증명하고 있다.

지난 시간은 ‘치우천황=용문양’을 증명하였다. 용문양은 전쟁의 승리와 평화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민간신앙처럼 사용되었으며 마침내는 온갖 부정한 곳을 예방하는 부적의 원조가 된 것을 증명하였으며 아울러 ‘치우=도깨비’란 원인을 밝혀 누명도 벗겼다.

이제 나머지 ‘치우 깃발=용대기’와 ‘치우 상징=둑기’를 함께 증명해 보자. 이유는 용대기와 둑기는 최고 통수권자의 상징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도 행차하는 곳마다 용대기와 둑기를 배례하였다. 이는 오랜 전통으로 최고 통수권자의 상징으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의 효시를 찾을 수는 없지만, 배달국 치우천황의 역사 속에서 근거를 엿볼 수는 있다.

치우천황은 홍산지역에서 출발하여 산동 일대에 또 다른 동이족의 청구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전쟁의 정복자였으며 마지막에는 중화족의 황제 헌원을 10여 년 동안 70여 차례 굴복시켰다. 이때 치우천황은 용대기와 툭기(纛旗)를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하였기에 오늘날 그 전통이 왕의 행차나 민속놀이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그 증거를 찾아보자, 무전기나 통신 수단이 없던 과거에는 최고 통수권자의 깃발 신호를 통해 전군이 일사불란하게 진격과 협공과 퇴각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수권자의 깃발상징은 현대에도 남아 각각의 부대나 사단에 존재한다.

당시 배달국은 부대상징으로 부락을 대표하는 동물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고조선의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치우천황은 뭍짐승의 우두머리인 용을 자신의 상징 깃발로 사용하였기에 가장 크게 그려서 용대기란 이름으로 가장 높이 달았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의 두레에도 남아 두레가 생긴 곳에 용대기를 높이 달고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가마나 말에 내려 예를 올렸으며 전시에는 장수들이 용대기 앞을 지날 때 자신의 기로 치우천황을 대하듯 예를 올렸다. 여기서 전래 된 민속놀이가 기세배놀이, 기절놀이, 기접놀이 등이다. 그래서 ‘치우깃발=용대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귀납법으로 이제 둑기를 증명해 보자. 역시 무전기가 없던 그 옛날에 전령의 긴급보고나 정보를 천황께 보고하기 위해 수많은 군막을 일일이 뒤져볼 수 없는 상황에 둑기를 세운 군막을 찾아서 쉽게 대면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기효신서에 독기는 행군 중에는 사용하지 않고 왕이 있는 중군에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용대기나 둑기는 치우의 상징으로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용대기는 민속놀이에 남아 최고의 의전으로 모셔지고, 둑기는 왕이 있는 곳에 항상 함께했다.

본래 둑기는 툭기란 명칭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이러한 툭기를 전령이 일일이 지니고 다니기에 불편하여 오랜 세월 동안 점점 간편화되어 마침내는 최고 사령관의 철모에 장식되어 툭기철모가 된 것이다. 그리고 툭기철모는 간편하게 투구로 불리면서 오늘까지 남아있다. 투구는 순수 우리말로 한자가 없으며 중국은 투구를 두무(兜鍪)라 쓰고 발음은 또우모우(dōu móu)라 한다. 우리의 투구와는 전혀 별개의 글자이다.

그럼 어떻게 툭기가 둑기나 독기로 변했는지 어원의 변천을 밟아보자.

한자로 문서를 만들던 조선의 군사의례인 세종실록오례나 국조오례의, 기효신서, 병장도설 등의 기록에 툭이나 둑이란 발음의 한자가 없던 시대에 궁여지책으로 소꼬리 독(纛)이란 한자를 차용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를 처음에는 ‘툭’이나 ‘둑’으로 읽었겠지만, 세월이 흘러 ‘툭기(纛旗)’란 발음은 잊혀지고 한자 발음 그대로 ‘독기’나 ‘둑기’로 병용해서 읽었고, 마침내는 한자를 차용한 근본 이유를 모르는 후세 학자들은 무조건 독기로 읽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좌둑기가 좌독기(坐纛旗)가 된 것이다.

이렇게 툭기는 둑기로 표기되었기에 이를 모신 사당을 둑신사(纛神祠) 기둑묘(旗纛廟) 등 ‘둑’으로 읽었고, 이곳에서 둑제를 올렸으며 이 장소는 본래 툭섬에서 둑섬으로 오늘날 경음화로 뚝섬이 된 것이다. 지금도 통영에서는 통제영 뚝제(纛祭)라 부른다.

정리를 하면 툭기를 전투모에 꽂아서 투구가 되었듯이 본래의 툭기는 한자 표기로 둑기(纛旗)가 되었고, 현재는 둑기나 독기로 병용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몽골의 신령스런 깃발 ‘툭’이나 만주어의 투란, 튀루크 등의 유사발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다음 시간 용대기의 에필로그에서 좌독기에 그려진 태극문양과 팔괘 등의 내용을 규명해서 용대기 관련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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