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천지를 뒤집어서 훔쳐 가려 하네 : 避亂途中滯雨有感
이 천지를 뒤집어서 훔쳐 가려 하네 : 避亂途中滯雨有感
  • 성광일보
  • 승인 2015.05.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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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3>

피란의 발길은 바쁘기만 하다. 입으로 전하는 소식은 어느 지역이 적군의 손에 들어갔다느니, 두고 온 집을 적기가 폭격했다는 갖가지 유언비어 같은 억측이 전해질수록 발길은 마음을 재촉한다. 이게 원일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그만 비가 내렸다. 일행들은 피난길답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수군수군 거리는 틈을 탄 시인의 정은 왜놈들의 못된 짓을 질타라도 할 요량이다. 시인은 왜놈들이 이 천지를 뒤집어서 모두 훔쳐 가려고 하거니, 천애의 먼 땅과 비바람도 또한 정이 가누나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避亂途中滯雨有感(피난도중체우유감) / 만해 한용운

한 해도 저무는데 왜놈군대 쩡쩡 울려

이 천지 뒤집어서 모두 훔쳐 가려하니

비바람 천애의 먼 땅까지 정이 듬뿍 가누나.

崢嶸歲色矮於人  海國兵聲接絶嶙

쟁영세색왜어인   해국병성접절린

顚倒湖山飛欲去  天涯風雨亦相親

전도호산비욕거   천애풍우역상친

 
이 천지를 뒤집어서 훔쳐 가려 하네(避亂途中滯雨有感)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쌓인 세월, 한 해도 얼마 아니 남았는데 / 왜놈의 군대 소리 산골에도 쩡쩡 울리네 // 이 천지를 뒤집어서 모두 훔쳐 가려고 하거니 / 천애의 먼 땅과 비바람도 또한 정이 가누나]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쌓인 세월 얼마인가 왜놈들 발자국 소리, 이 천지 훔쳐가려나 비바람도 정이 가고'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피난 도중에 비 때문에 머물러 지내며]로 번역된다. '피난'하면 쉽게 6.25를 연상한다.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우리 민족은 줄곧 피난을 다녔다. 옷가지 몇 점 들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피난을 다녔다. 을시늑약이 맺어진 뒤에도, 한일합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 곳을 찾고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피난사이고 쫓김의 연속이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시인은 왜놈들의 발자국을 피해 피난을 가다가 비를 만나 잠시 어느 곳에서 머물렀다. 쫓기는 신세 속에 느낌이 있어 시상을 떠올렸다. 침략의 쌓인 세월 속에서 한 해도 얼마 남지 아니하여 저물어 가는데 왜놈의 군대 소리가 산골까지 쩌렁쩌렁 들린다고 했다. 국토의 어느 곳 어느 산하인들 짓밟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니.

▲ 장희구 박사
화자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침략자들이 이 천지를 뒤집어 훔쳐 가려고 저리도 야단법석인데, [천애의 먼 땅과 비바람도 또한 정이 가누나]라고 읊었다. 손 떼가 묻고 탯줄이 묻혀 있는 내 산천 어느 곳인들 정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겠지만, 밟히는 곳곳 모두가 아픔의 큰 상흔(傷痕)이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 보면서 어이없어하는 화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고, 처참한 모습 앞에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한자와 어구】
崢嶸: 매우 깊고 먼 모양. 歲色: 세월. 矮於人: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보다 작다. 海國: 왜국. 곧 일본. 兵聲: 군인의 소리. 接: 접하다. 들리다. 絶嶙: 깊은 산골. // 顚倒: 뒤집다. 湖山: 온 산하. 飛欲去: 날아 움지고자 하다. 天涯: 하늘가. 風雨: 바람과 비. 亦: 또한. 相親: 정이 가다. 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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