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5)
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5)
  • 서울동북뉴스
  • 승인 2012.06.2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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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 <비전경영전략컨설팅 대표>

3. 서희의 외교담판
가.서희, 그는 누구인가?

 
서희는 경기도 이천(利川)사람이다. 서희의 조부는 서신일로 그가 이천 서씨의 시조이다. '고려사'에 그에 관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사슴이 화살에 맞아 도망왔기에 서신일이 화살을 뽑고 숨겨줘 살려준 적이 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사슴은 나의 아들이다. 그대의 힘을 입어 죽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그대의 자손을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라”하였다. 서신일은 나이 80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서필(徐弼)로 서희의 아버지다.
서필은 광종이 중국 귀화인을 후대해 신하의 주택을 착출해 마련해 주는 등 과분하게 대우하자 자신의 집을 광종에게 회수하도록 건의함으로써 이러한 처사를 바로 잡도록 한 충언과 대쪽 선비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광종은 금제 그릇을 서필에게 하사하자“신하가 금제 그릇을 쓰면 임금께서는 녹슨 그릇을 쓰겠는가?”하고 분에 넘친다 하여 사양한 바 있다. 광종은 이 처사를 보고 “경은 보물을 보물로 삼지 않으니 나는 경의 말을 보물로 삼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서필은 오늘날의 총리격인 내의령(內議令)에 올라 재상이 되었다.

서필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서희(徐熙)이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936)지 불과 6년 뒤인 942년에 내어났다. 서희는 19세 때 갑과에 급제해 31세 때 내시랑에 올라 광종 23년(972)에는 사신으로 송나라에 파견되어 중국 문물을 익히고 외교 감각을 키웠다. 송 태조는 서희에게 검교병부상서의 벼슬을 주었다. 고려 성종 3년 서희는 병관이사(국방장관)로 승진했고, 충언을 서슴지 않는 곧은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 후 내시랑으로 보임되어 중군사(中軍使)로 거란군과 맞서게 되었다.

서희는 당시 동북아 국제 정세에 밝았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서희는 단순히 말만 잘했던 외교관이 아니라 지·덕·용(知·德·勇)을 겸비하고,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사고로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나, 고려초의 동북아 정세
1) 송의 중국통일

고려의 삼국통일(936)에 이어 중국에서는 송(宋)이 5대10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송에 앞선 다섯 왕조를 5대로 부르고, 강남과 강서에서 부침한 나라를 10국이라 하여 5대 10국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 왕조의 창업자들은 남당의 이승(李昇)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나라 말 절도사 출신이었음을 볼 때 이 시기는 이민족 출신 절도사에 의한 무단 정치의 격변기였다.

곽위는 한족 출신으로 후주(951~960)를 건국했는데 곽위의 아들 세종은 중국의 통일을 위해 거란과 항쟁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조세삭감과 토지 개간 등 개혁을 실시하고 민생안정에 노력하였다. 세종은 뛰어난 군주로서 왕조 찬탈과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이 되어온 사병(私兵)을 정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불행하게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후주의 장군출신으로 귀덕 절도사였던 조광윤(趙匡胤)은 거란과 북한국의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진군하던 중 세종이 사망하자 아군의 옹립을 받아 즉위하고 송을 건국(960)하였다. 이로써 당 멸망 후 54년간의 혼란은 종식되고 송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송은 거란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송은 거란과의 고량하 전투에서 패전하여 거란이 점유하고 있는 연운 16주를 회수하지 못한 채 양국관계는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거란도 농경파와 유목파의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송을 전면 공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송과 거란의 두 강대국이 대치하고 있는 정세하에서 그 동쪽에는 고려와 여진이, 서쪽에는 서하가 세력을 형성하여 동아시아 정세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2)거란
장성 밖에서 힘을 키워 북방 유목세게를 통일한 것은 거란이었다. 거란은 만주의 요하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시라무렌(siramuren)의 비옥한 초원에 근거지를 두고 유목생활을 하던 동호(東湖)로 알려진 유목민족이다. 그리고 해와 습과 같은 사촌간이라고 볼 수 있는 유목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거란 부족의 명칭은 405년경 북위시대의 석각문(石刻文) 각문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5세기에는 이미 유목집단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위치한 요하 상류는 남으로는 중국의 요서를 압박하고, 북으로는 대흥안평에 둘러싸여 방비에 수월하며, 서로는 유목세계의 중심지인 몽골고원과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중국왕조와 몽골고원의 유목국가 그리고 만주세력 간에는 늘 미묘한 갈등 관계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송나라와 국경을 맞대면서 갈등을 빚었고, 여진족을 가운데 두고 고려의 움직임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거란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자 수차례 전쟁을 하였고, 송나라와 향후 패권 전쟁을 하려면 고려를 자기 편으로 두어야 했다. 그래서 거란은 제1차 고려 침략을 하게된다.

3)여진
거란이 동란군 수도를 요양으로 서천한 이래 발해의 피지배 계층이었던 말갈족은 조직적인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으나 거란의 강압적인 사민정책과 탄압에 못 이겨 곳곳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적 연합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대한 조직적 저항세력으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연합체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도 대씨(大氏) 정안국과 같이 해로로 중국과 통할 수 있는 압록강 하구방면에 그 본거지를 잡은 것이다. 이시기로부터 만주지역에 산재했던 말갈족은 중국과 거란 그리고 고려의 사료(史料)에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송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에 송, 거란, 고려와 이해 관계가 있었던 여진은 주로 압록강 하구 방면의 서여진이었다. 정안국(定安國)은 발해 광복을 목표로 하나 현실적으로 거란의 압박하에서 생존의 문제가 보다 절실했다. 따라서 송에 복속하고 고려와의 화친이 필요했다. 여진도 구발해의 지배층이었던 정안국과 제휴해 송에 조공하고 고려와의 화친을 필요로 했다. 이들은 송과의 사대관계를 근간으로 해서 거란에 대해서도 등거리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는 송과 거란의 두 강대국이 대치하는 가운데 동편에 고려, 정안국과 여진이,서편에는 서하가 자리 잡으면서 팽팽한 외교전과 함께 때로는 국지전을 병행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다,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등장
서기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칩임하였다. 거란의 소손녕은 말한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하였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고려의 군신(君臣)들은 우리의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호령하였다. 거란으로 부터 항복을 요구받은 고려의 조정은 홉비백산하였고, 고위 관리들은 갑론을박의 논쟁을 했다. 거란에 항복해야 한다는 투항론(投降論)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두되었다. 이 두 논쟁은 80만 대군의 거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거의 할지론으로 국론이 결정되려는 순간에 서희가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였고, 이지백(李知白)이 서희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서희는 “우선, 거란이 왜 고려를 침범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 대응해야하며, 만약 항복해야 한다면‘한 번 싸워보고 난 뒤’결정해도 늦지않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은“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세에 남을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때 서희가 나선다. “제가 비록 부족하오나 왕명을 어찌 받들지 않겠나이까?”하였다. 이리하여 성종의 명을 받아 서희가 협상에 나선다. 그러나 서희가 협상에 나서기 전에 1,2차 협상이 있었고 안융진 전투가 있었다.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살수(청천강) 근처의 봉산군까지 침입하였을 때 서희는 봉산군을 구출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의 고려 침입에 대한 요구 조건을 분석하여 고려조정에 협상의 가능성을 제안하여 성종과 대신들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이몽전에게 제1차 협상을 하도록하고, 안융진 전투 후, 장영에게 제2차 협상을 하게 하였다. 이어서 서희가 직접 제3차 협상을 하여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는 성과를 도출해 냈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살펴보자. 서희가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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